등록날짜 [ 2015-02-10 02:12:39 ]
몇 주 동안 코가 꽉 막혀 살았다. 비염이 심해져 축농증으로 전이한 데다 급체까지 겹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기어이 주일 기관모임에 가겠다고 23개월짜리 아들을 둘러업었다.
청년 시절에 나는 자타공인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오라 가라 하는 게 싫고 간섭받는 게 싫어서 적당히 충성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신앙생활 했다. 그러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해 신혼부부실에 잠시 속했다가 여전도회에 배속되었다.
출산을 몇 달 앞두고 “오라”는 여전도회장의 성화에 몇 번 참석했지만 그래도 가기 싫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예배만 드리고 집에 와 버렸다. 그러다 재작년 3월 아들을 낳고 입원해 있었는데, 한 번밖에 얼굴을 본 적 없는 구역식구들이 찾아왔다. 거리가 머니까 안 오셔도 된다고 해도 기어이 찾아와서는 아기 내복이며, 옷이며, 겉싸개를 선물로 주셨다.
산모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합심으로 기도해 주고 곧장 돌아갔다. 그 뒷날에는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는 교구장과 지역장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아이 양육이며 산후조리에 대해 조언해 주고 기도도 해 주었다.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나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은 구역이라고 선물까지 사 들고 먼 길을 찾아온 것이며, 교구장과 지역장은 어찌 그리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와 주는지…
며칠 입원해 있다가 산후조리원으로 옮겼다. 정성껏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아이까지 돌봐 주니 이런 호사가 없다 싶었지만 온종일 방 안에 누워만 있으니 점점 침울해졌다. 낮에도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퇴근하고 찾아오는 남편에게 괜히 짜증을 냈다. 몇 번이나 언성이 높아지고 마음도 상했다. 말로만 듣던 산후우울증이 슬며시 찾아온 것이다. 꼭 읽겠다던 성경도 눈에 안 들어오고 목사님 설교 테이프도 듣기 싫었다.
이런 마음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잠깐 들르겠다”는 문자만 보내고 여전도회 기관장과 기관식구들이 우르르 찾아왔다. “먹는 건 어떠하냐?”에서부터 소소한 질문들을 늘어놓더니 기어이 나를 한바탕 웃게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도 산후조리원에 혼자 있다 보면 괜히 우울해지고 짜증이 나더라는 거다. 그래서 신랑과 한바탕 싸우기도 했다며. 그러고는 가지고 온 선물들과 편지를 주고 갔는데 그걸 방 안에 앉아 풀어보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님처럼 섬긴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나는 친한 사람한테만 잘해 주고 나에게 호의를 베푼 만큼 딱 그만큼만 섬길 줄 아는데 이들은 정말 주님처럼 섬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들의 섬김이 무척 고마웠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오자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밤낮이 바뀐 신생아에 매달려 하루 세 끼 챙겨 먹는 것도 힘들어할 때, 내가 친정엄마가 안 계셔서 힘들 거라고 누가 귀띔했는지 여전도회 식구 몇이 반찬을 만들어 찾아왔다. 미역국까지 한 솥 끓여 와서는 “없는 솜씨로 만들었지만, 잘 챙겨 먹으라”는 말만 하고 돌아갔다. 그날 미역국을 먹는 건지 눈물 콧물을 먹는 건지도 모르게 감동했다. 나도 조건 없이 섬겨 주고 사랑해 주는 이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 기관모임도 즐겁고 구역모임도 즐겁다. 아줌마들이 수다스러워 보이는 건 서로서로 안부를 묻고 조언해 주고 위로해 주기 위한 섬김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나도 그들 틈에 끼여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며 같이 고민하는 진짜 여전도회 아줌마가 되어 가고 있다.
김은혜 집사
(75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2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