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02 23:03:43 ]
벌써 26년 전 일이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서소문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봤더니 중학교 졸업 후 소식이 끊긴 친구였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새까만 교복을 입고 교정을 오가던 해맑던 시절, 유독 가깝게 지낸 예쁘고 다정한 친구였다.
꿈같은 만남은 분명 하나님이 여신 길이었다. 친구는 내가 다니던 직장 맞은편 K항공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외롭고 힘든 사회생활에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당시 나는 9년간 A시멘트 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상사의 대내외 일정 관리와 다양한 업무로 사회 초년생의 하루는 늘 긴장상태였다. 인터폰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고, 집무실 내에서 느닷없이 고성이 터지고, 결재서류가 휙휙 날아가는 날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게다가 소속한 부서의 서무, 경리 업무와 산하 7개 공장 영업소 관련 매출대장 관리를 혼자 맡아 했다. 무엇보다 동기 한 명 없이, 서슬 퍼런 선배 여직원과 지내기가 가장 어려웠다. 회사 내 여직원 모임을 시작으로 산악회, 봉사회, 테니스와 볼링 모임에서 총무로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해방구였다.
극적으로 친구를 만난 후에는 K항공 신우회원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령을 체험했다. 그 후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사회복지 생활시설을 운영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다시 주님과 멀어졌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날, ‘이제 다시는 교회에 갈 수 없겠구나’라며 스스로 결박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친구를 통해 또 나를 불러 주셨다.
“최근에 전도 받았는데 나와 그 교회에 같이 가자.”
당시 만삭의 몸이었지만 그칠 줄 모르는 회개의 눈물로 연세중앙교회 망원동성전에서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을 만났다. 그렇게 연세중앙교회와 맺은 인연이 지금에 이른다.
친구는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하다 얼마 전 퇴직을 앞두고 고국에 돌아왔다.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섬기고 있다. 1000km 속도로 열두어 시간 날아가야 하는 그 먼 나라에 비하면 지척인데 왜 그리 친구가 멀게 느껴지는지, 왜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무겁고 아리기만 한지 알 수 없다.
돌이키니 이국땅에서 아들 셋을 키우며 외롭게 신앙생활 했을 친구를 위해 내가 한 일이 너무 없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던 시절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을 대하지 못한 날이 허다했으니 말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언제나 의연하게 잘 견뎌 내리라 믿었던 것 같다. ‘깊은 배려 담긴 믿음의 기도와 살가운 인사 한마디도 인색했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저민다.
친구는 둘도 없는 내 영혼의 은인이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영적인 교회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여전히 주님 앞에 휘청거리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반석의 믿음을 사모하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 모두 친구의 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마운 친구와 꼭 함께 천국 가고 싶다. 눈물과 슬픔과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아픔이 다시 있지 아니한 아름다운 천국, 영원한 본향에 꼭 같이 가고 싶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믿음 없이 삶에 전전긍긍하고, 사욕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습관처럼 교만하던 지난날들을 뒤돌아본다.
매일 찌든 때와 같은 죄를 버리고 주님의 일에 귀히 쓰임받는 자, 믿음의 본이 된 직분자로서 다급히 천국을 예비해야겠다. “친구야, 같이 가자!”
장선화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2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