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천국을 소유하면 고난도 달달해

등록날짜 [ 2015-03-10 15:38:58 ]

함경북도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한 총각이 있었다. 이 총각의 큰형은 8·15 광복 때 돈 벌러 간다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6.25사변이 발발했다. 총각은 1.4 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남으로 떠밀려 내려갔고, 연고자 하나 없는 거제도에 정착해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몇 년 후 거제도에서 온갖 허드렛일로 고단함에 찌들어 있을 때쯤 웬 경찰관이 총각의 이름을 대며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총각은 잔뜩 겁에 질려 경찰관을 찾아갔다. 뜻밖에도 그 경찰관은 그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 하던 큰형이었다. 동생의 고단한 삶을 본 형은 경기도 오산에 사 놓은 방앗간을 운영해 보라고 했다. 동생은 북한에서 방앗간을 운영해 본 터라 흔쾌히 오산으로 올라갔다.

 

경기도 연천 어느 마을에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한 처녀의 가족 역시 6·25사변이 발발한 후 남으로 피난을 와 경기도 오산에 정착했다.

 

성실 근면하기로 소문난 이 총각과 얌전하고 곱상한 연천 처녀 사이에 혼담이 오갔고, 그 둘은 가족과 동네 사람들의 축하 속에 결혼했다. 몇 년 후 경기도 포천으로 거처를 옮긴 부부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330㎡(100평) 되는 땅을 사들여 넓은 마당과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양옥을 지어 2남 3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남자 나이 오십에 늦둥이가 하나 생겼다. 아내도 나이가 사십대 후반인 터라 아기를 지우려고 했다. 그 당시 시골에는 중절 수술 시설을 갖춘 병원이 없었기에 한의원에 드나들며 아기가 떨어진다는 침을 맞고 한약도 수없이 먹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71년 5월, 아기가 태어났다. 분명 장애를 안고 태어났으리라 짐작한 산모는 아기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조산사가 아기를 받아서 건강하다며 아기를 산모에게 보여 주었다. 이 아기가 바로 나.

 

아버지는 온갖 고생으로 몸이 병들어 5년간 앓다가 내 나이 일곱 살 때 생을 마감하셨다. 가장 없는 가정에서 세상 경험 없는 어머니가 가장이 되어 안 해 본 일 없는 고생으로 자녀를 길렀고,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가난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가난과 고생을 모면하려 우상숭배에 매달렸지만 우리 가정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내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시련의 연속으로 헤어나갈 구멍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반장을 따라 나간 교회에서 주님을 뜨겁게 만났고, 그때부터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 기도는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 친정 가족이 모두 예수를 영접했다. 현재는 우리 친정 식구 대부분이 오직 예수만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간구한 모든 기도가 언제 어떻게 응답될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이 꼭 이루신다는 확신이 있다. 지금까지 주님이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나를 통해 일하시고 이루고 계심을 보고 느낀다.

 

이제 시부모님께서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을 사모하게 될 그날까지 내 기도는 쉬지 않을 것이다. 또 믿지 않는 골육 친척을 향한 뜨겁고 간절한 기도도 쉬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은 행복과 기쁨과 평안보다는 고난과 고통과 고생의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영혼의 때의 부유를 알고, 또한 믿는다. 지금의 고생은 장차 주님께 받을 축복을 잉태하는 잠깐의 과정이라 믿으며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고생을 달게 받을 것이다.

동해경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25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