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영원한 삶을 위한 선택의 문제

등록날짜 [ 2015-03-17 11:22:14 ]

어느덧 3월. 요 며칠 바깥 찬 공기가 손을 시리게 하지만 조금 있으면 날씨가 풀릴 터. 땅에서 나무에서 싹이 돋고, 꽃도 필 것이다. 계절 변화에 맞춰 옷을 바꿔 입는 일은 별 고민거리가 아니다. 이미 여러 해 반복했기 때문이다. 옷 선택은 그날 하루 고생으로 끝나지만 한 사람의 인생, 혹은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선택은 이와 다르다.

 

인류 최초로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은 아담과 하와였다. 그들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절대로 따서 먹지 말라 명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지, 불순종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그 선택은 본인들뿐만 아니라 후손인 인류 전체에 죄와 저주와 질병과 사망과 지옥 형벌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부왕 때부터 이어 온 노역을 경감해 달라는 원로들의 간청을 무시하고, 그와 정반대인 동년배의 말을 선택했다. 결국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 국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일본(왜국)에 다녀 온 조선국 통신사들은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한다. 일본이 반드시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는 예측과 그와 정반대되는 보고였다. 결과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택했다. 조선 개국 후 전란이 없었고, 일본을 미개한 변방국가로 여겼으며, 여차하면 명나라가 도와줄 것이라는 안이함이 당시 조정대신들에게 그런 결정을 하게 했다. 그 선택의 결과, 무방비 상태로 겪은 7년 전쟁은 조선에 치명적인 인적·물적 피해를 줬다.

 

선택할 때는, 이익만 있는 경우에는 이익이 가장 큰 쪽으로, 이익과 손해가 공존하는 경우에는 이익이 손해보다 크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손해만 있는 경우라면 손실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해당 선택으로 발생하는 이익은 클수록 좋고, 손해 보는 위험은 적을수록 좋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뱀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죽을 위험은 없고, 선악을 아는 지혜를 얻는 이익만 발생한다고 여겼다. 만약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무시무시하고 확실한 결과인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무게를 두었더라면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르호보암 왕이나 조선 조정은 ‘권력의 안정’이라는 선택을 할 때 발생할 위험을 경시했기 때문에 국가 분열이나 전란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이는 당장 눈앞의 유익에 더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면 비극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터다.

 

윤석전 담임목사님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영원히 사는 내 영혼의 신세를 생각해서 행하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성경 말씀마다 영원한 유익을 얻고자 할 때 우리가 생각하고 행할 바를 일러 준다. 100년을 살기도 힘든 인생에서 죄가 주는 쾌락만 좇다가 영혼의 때에 영원한 고통으로 살 것인가.

 

때로는 수고와 슬픔이 있을지라도 육신의 때에 하나님을 좇다가 영혼의 때에 영원히 행복할 것인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수학에서는 무한대 더하기 100도, 무한대 빼기 100도 다 무한대다. 무한한 영혼의 때에 비하면 100이라는 수는 존재가치가 없다. 비율로 따져도 더 긴 쪽에 유익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김현민 집사

35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2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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