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부모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

등록날짜 [ 2015-03-30 17:04:27 ]

새로 지은 2층 양옥들 사이에 있는 키 작은 한옥. 파란 한옥 대문을 열고 왼쪽 모퉁이를 돌면 방 두 칸짜리 우리 집이 있었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방 한쪽에 놓인 전기 프라이팬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밀가루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설탕과 베이킹소다를 넣어 만든 노릿한 밀가루 빵. 우리 집 4남매는 밀가루 빵으로 하교 후 주린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초라한 밀가루 빵이 그때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밀가루 빵에 질릴 쯤에는 각종 모양의 엄마표 유과가 간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쩌다 라면이라도 먹는 날이면 라면 한 솥에 밀가루 수제비를 떼어 넣고 김치를 넣어 라면인지, 김치 수제비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이 우리 4남매 별식이었다. 나는 이 라면이 참 싫었다. 예민하고 입맛 까다로운 나는 밀가루 수제비로 텁텁해진 이 라면이 너무 싫었다.

 

“엄마는 왜 라면에 자꾸 이상한 걸 넣고 그래? 나 안 먹어.”

그 시절, 내가 아는 삼계탕은 닭죽이었다. 닭 한 마리에 찹쌀 한 바가지를 넣고 끓인 닭죽. 닭은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도 찹쌀 죽은 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어떤 음식을 하더라도 양을 최대한 늘려야 했다.

 

가난해서 모든 것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남들처럼 가게에서 과자나 간식거리를 사 먹일 수도 없었다. 사람 머릿수대로 라면 봉지를 뜯어 끓일 수도 없었다. 엄마의 사명은 매일 4남매 배를 곯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입고 쓰는 것은 2차적 문제였다.

 

엄마는 우리 4남매에게 ‘못 말리는 분’이다. 자신을 온전히 다 내려놓고 엄마로서 담당할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지금도 자식들의 필요와 사정, 마음을 먼저 아시고 자식보다 한 발 앞서 가시며 뒤따르는 자식들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지으시는 분. “에구, 못 말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우리 엄마. 엄마는 자식들을 “주고 싶은 도둑놈”이라고 칭하신다. 주지 못해 한이 될 뿐, 한없이 주고 싶은 것이 자식이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 인생을 다 내어 주고도 더 해 주지 못해서 마음 아파하는데, 자식은 부모의 인생을 전부 가지고도 더 받지 못해 불평불만 하고 원망한다. 나도 엄마가 된 지 13년쯤 되니 알 것 같다. 부모가 아무리 자기 인생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넘칠지라도 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을까.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 우리 죄를 해결하시고, 지옥에서 살리신 나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천국을 가졌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육신의 정욕과 소욕 때문에 주님께 불평불만하고 원망한다. 강단에서 담임목사님을 통해 “기도해야 산다” “기도는 불가능이 없다”고 끊임없이 듣지만 주님 목소리는 외면한 채 내 수단과 방법만 쫓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께서는 올해도 ‘전 성도 40일 그리고 10일 작정 기도회’에 우리를 초청하셨다.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무관심한 자는 아버지의 사랑과 응답을 거절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번 작정기도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원하고 기대한다. 할렐루야!

김지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2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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