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를

등록날짜 [ 2015-06-10 11:40:16 ]

경제신문을 보다가 낯익은 기업,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모 그룹 회장이 그룹을 분할하여 두 아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는 자식에게 대부분 기업 경영권을 넘기기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런데 이 기업은 남다른 2세 교육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장남은 수개월간 원양어선을 타며 일을 배웠고, 차남은 대학 졸업 후 유학길에 오르지 않고 캔 공장 생산직을 거쳐 영업 일선에서 말단 사원부터 업무를 익혔다.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하니 직원들이 공장 내에 후계자가 일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는데, 도무지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기사를 읽다가 문득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흐뭇한 옛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985년, 하루에 두어 차례만 완행버스가 다니는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서울로 전학을 왔다. 시골 학교에선 전교생이 100여 명이었지만, 서울에선 한 학년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그 많은 학생과 큰 학교에서 생활하게 되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촌티를 폴폴 풍기던 나는 마치 백조 무리 가운데 있는 흑조 한 마리 같았다. 서울 아이들, 어쩌면 그리도 예쁘고 뽀얀지….

 

몇 달이 지나 낯설고 서먹한 느낌이 사라질 즈음, P라는 남학생이 전학을 왔다. 키도 작고, 덩치도 왜소했다. 그 아이도 시골에서 전학을 왔기에 낯설고 서먹할 것이 염려돼 기회가 되면 친절을 베풀리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P가 수많은 학생 가운데서 나를 콕 찍어 괴롭히기 전까지는.

 

어느 순간부터 P는 대놓고 혀를 쑥 내밀며 “메롱” 하더니 “아프리카 새깜둥이” “깜씨” 등등 온갖 유치한 말로 조롱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학교에 가기 싫을 만큼 날이면 날마다 심하게 놀려댔다. 요즘엔 가볍게 놀리기만 해도 선생님, 부모님과 상의해서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같은 동네 살던 친구가 그만하라고 가끔 말리기도 했지만 P는 더 심하게 괴롭혔다.

 

‘넌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니? 네 부모님이 네가 학교에서 이렇게 개구쟁이로 생활하는 걸 알고 계시기나 하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그저 그 아이가 불쌍해 보였고, 말을 섞기가 싫어서 졸업하고 헤어질 날만을 기다렸다. 괴롭힘은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P는 혀를 날름거리며 짓궂은 웃음과 함께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그만 좀 해라. 얘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그래? 사람이 사람한테 그러면 되냐?”

 

순간 P도, 나도 얼어붙었다. 반 친구들의 시선이 우리 셋에게 쏠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P의 놀림이 그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두 외면할 때 내 입장을 생각해 준 그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부모님이 자식 교육을 참 잘 시키셨구나’라고 생각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방금 읽은 그 경제신문 위에 점점이 박혀 있다.

 

세월 참 빠르다. 나는 이제, 내 아이가 친구를 괴롭히면 어쩌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어쩌나 고민하는 부모가 되었다. 내 아이가 어릴 적 내 친구처럼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한다. 또 죄로 지옥 갈 우리 인류의 영육 간 고통을 해결해 주신 ‘내 친구’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웃 영혼의 고통을 끌어안고 해결해 주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김영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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