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9-29 23:55:31 ]
참척(慘慽). ‘비참하다’의 ‘참’과 ‘너무 슬픈 고통’을 뜻하는 ‘척’이 만난 단어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용합니다.
성경에는 ‘참척’을 당한 나인 성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눅7:11~17).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늙은 과부가 참척을 당했습니다. 아들 대신 죽을 수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했으련만 삶의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죽은 아들이 누운 상여 행렬과 예수의 일행이 만난 순간, 예수께서는 어미의 깊은 아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미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척을 당해 망연자실하여 통곡하는 여인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녀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애처로웠으면 “울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실 만큼 나는 내 자녀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영적 참척을 당한 내 아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내 자녀가 너무도 불쌍해 보입니다. 내 아이는 느끼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큰아이가 중학생이던 시절, 아이를 위해 주님께 애통하며 매달리던 그때는 나 또한 믿음이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말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21)는 구절의 ‘마땅히’라는 단어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처참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갈 때 등을 돌리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그 마음, 아들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권세를 꼭 지켜 주시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가 회복될 때까지 다시는 내 아들을 짓밟히게 하고 싶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 고백이 느껴져 눈물을 흘린 듯합니다.
오래전 어떤 분이 간증해 주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새벽마다 우리 모두를 깨워 기도하게 하셨는데 저희를 위한 기도 소리는 들을 수 없고 오직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만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정말 대단하다. 나는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잘되게 하고 싶은 육적인 욕심이 가득해 내 자녀가 꼬리가 되지 말며 머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가장 중점인데…’ 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증하신 분이 지금은 물질욕, 권력욕, 세상 부귀영화에 사로잡혀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내 자녀의 영적인 참척에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아이가 겉보기에는 말짱하게 살아 있지만 속사람은 관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부모가 내 아이 영혼을 위해 눈물로 애통해한다면, 주님께서는 울고 있던 나인 성 어미에게 하셨듯이 나를 더욱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 내며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6~28).
서봉선 집사
(59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