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2-02 18:59:01 ]
한때 주일학교에서 담임을 맡았던 초등 1학년 아이 재성이(가명)는 항상 바빠서 놀 시간이 없고 성경을 읽을 시간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학원을 두세 군데 다녀서 놀 시간이 없다면서 죽고 싶다고도 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맞벌이라 아이를 홀로 둘 수 없으니 학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려서 복잡하고 힘든 일을 참지 못하고, 놀기를 먼저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들이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했다.
올해 초, 열 살 아이의 동시집 『솔로 강아지』가 출간돼 보는 이들의 간담이 서늘해진 일이 있었다. 시집에 실린, 일명 ‘잔혹 동시’라고 불린 <학원 가기 싫은 날에>란 시가 문제였다. 학원 가기 싫은 아이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엄마를 씹어 먹어, 눈깔을 파먹어’ 등 어린아이의 글이라고는 참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단적이었다. 거기에 삽화는 호러(horror) 물에서나 볼 수 있는 섬뜩한 그림이었다. 아이가 혼자 끄적인 시를 모아 시집으로 만들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의 엄마였다. 시집이 출간된 후 학부모들과 대중의 비판이 폭풍우처럼 거세자 출판사가 전량 회수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일은 우리 정서상 비난이 예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며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작품으로만 보라고 한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경우, 때론 더 잔인하고 악한 말도 하는 예를 볼 때 이해되는 면도 있다.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자신 있게 돌을 던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썼다고 굳이 시집으로 발간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무엇에나 칭찬하고 세워 주는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그 시를 쓴 이유는, 늦게 잠을 자서 수면부족 상태로 한 군데 가는 학원에 가기 싫어서였단다. 그 아이가 철들고 성인이 되어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할 때, 살을 도려내고 싶은 골 깊은 상처가 되리라는 것이 기우(杞憂)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지 20여 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인터넷상에 오르면 개인의 사소한 일상도 지켜내기 어렵다.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절제가 없으면 무분별하고 사소한 행위가 독이 되어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것이다.
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녀 교육에 왕도(王道)가 없다는 점을 시시때때로 절감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부르짖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창의적인 사고의 가치가 높아지자 그 반대로 전체 속에 옳고 그름의 도덕과 윤리는 이미 실종된 지 오래다. 좁은 도로 한가운데로 차를 피하지 않는 사람이 걸어가도 경적을 울리기 어려운 세상이다. 공동주택에서 소음 문제로 다투다가 일어나는 살인도 심심찮게 접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시밭이나 자갈밭이 되지 말고 옥토가 되어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말씀 위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반드시 지켜 행하라고 하셨다. 윤리 도덕이 상실되고, 어떤 세상이 되어도 하나님은 공의의 잣대로 심판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종국에는 우리 인생의 마침표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흑백으로 명확하게 분리될 것이다. 성경에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갈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바로 알게 하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내기를 기대한다.
이진숙 교사
사무엘부
위 글은 교회신문 <4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