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1-12 23:49:55 ]
어느 날 고등학생인 아들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엄마, 저 교회 다니고 싶지 않아요.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의미 없는 교회생활에 시간을 들이는 게 너무 아까워요.”
자기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가득 차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는데 이젠 이런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유를 찬찬히 들어보았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걸 알고 계신다면, 저희의 미래와 운명(천국 갈지 지옥 갈지)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거죠. 선악과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줄 알면서도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셔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죠? 이런 분이 어떻게 선하시다는 거예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올 것이 왔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담임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수없이 말씀하신 내용으로 답하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아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아들아, 세상에도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말이 있어. 잘못된 길을 가도록 법을 만든 게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지 말라고 법을 만든 거잖아. 지옥과 같은 무서운 심판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무서운 심판에도 겁 없이 죄짓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거지.”
아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들은 바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사랑의 하나님’보다 ‘공의의 하나님’이 더 세시다는 말씀이네요. 그냥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면 안 돼요? (비아냥거리며) 이렇게, 저렇게 잘해야 사랑해 주시는 건 ‘조건적 사랑’ 아녜요?”
“똑같은 사실을 보고도 어떤 아이는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누리는 은혜에 비해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매우 관대하세요’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너는 왜 이리 부정적이니?”
“휴~ 내가 이러니까 엄마하고 이야기 안 해요.”
대화는 끊어졌다. 안 되겠다 싶었다. 더 현명한 답을 찾아야 했다.
오래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이 유행했다. ‘거꾸로 읽는다’는 모범답안이 아니라 문제를 계속 제기해 진정한 해답을 얻어 보자는 뜻이다. 요즘 10대, 20대들은 무조건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반항하는 자세’로 시스템화된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성경을 거꾸로 읽는 관점으로 아들을 이해시키며 다른 시각으로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오산이었다. 내가 이런 답들을 늘어놓을수록 아들은 더 듣기 싫어했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와 다투었다.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왜 먹히지 않았을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른 후, 아이를 지켜보니 아이는 진정으로 논리적인 답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답답함에 하나님께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0~21).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지식으로 어찌 판단하랴. 아들이 머리가 아닌, 체험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서봉선 집사
(60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6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