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6.25에 참전한 미군 부자(父子)들

등록날짜 [ 2016-05-25 13:37:23 ]

6.25사변 당시 미군은 많은 부자(父子)가 동시에 참전했다. 미국 고위층과 현역 장성 아들 총 142명이 6.25사변에 투입됐고 그중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해병대 필드 해리스소장은 제1항공사단 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아들 윌리엄 해리스중령은 장진호에서 중공군과 싸우던 해병 제1사단 소속 대대장이었다. 아들인 윌리엄 중령은 중공군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행방불명됐다. 모두 윌리엄 중령이 포로로 잡혔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포로 교환 당시 명부에는 그의 이름이 없어서 중공군 기습 당시 전사했거나 포로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월튼 워커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리에 방어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했다. 아들 샘 워커대위도 사령관인 아버지 명령하에 터키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 방어의 첨병으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월튼 워커 장군은 1950년 아들의 은성무공훈장 수훈을 축하해 주러 가다가 사고로 순직했다. 아들 샘 워커는 비보를 듣고서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흔들림 없이 북한군과 끝까지 싸웠다. 훗날 아버지처럼 미 육군 장성에 오른다.

 

1952, ‘마크 클라크대장은 38선을 기준으로 치열하게 전투하던 당시 UN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아들 윌리엄 클라크소령은 당시 대위로 1951년에만 훈장을 세 번이나 받을 정도로 용맹했다. 하지만 큰 부상을 입어 전역할 수밖에 없었고 전역 후 얼마가지 않아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클라크 대장은 6.25사변으로 외아들을 잃은 것이다.

 

8군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대장은 UN군 총사령관도 역임했다. 아들 제임스 플리트는 공군 대위로 ‘B-26B’ 폭격기를 타고 북한군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24, 북한 지역을 폭격하던 제임스 대위의 비행기가 복귀하지 않았다. 수하 장교들은 상관의 수색 기간 연장을 제안했지만 아버지인 밴 플리트 대장은 종결 지시를 내렸다. 아들을 수색하는 것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의 아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제임스의 행방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아이젠하워미국 대통령은 195212월 대통령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대통령을 미군 장교들은 존경해 마지않았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근심거리 하나가 있었다. 그 근심거리를 당시 아들을 잃은 밴 플래트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전사하면 나는 가문의 명예로 생각하고 감내할 수 있소. 하지만 아들이 포로로 잡힌다면 적에게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좋은 인질을 제공하게 되오. 나는 우리 국민과 군인들에게 그런 부담을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소.”

 

이후 아들 아이젠하워 소령은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육군 준장으로 전역해 벨기에 주재 미국대사가 되었다.

 

6.25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 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왜 남의 나라에서 고위층 장군의 아들들이 죽음을 무릅 쓰고 이 나라를 지켜야 했을까 돌아본다. 또 그렇게 지킨 이 나라를 어떻게 우리는 지켜야 할까 생각한다.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우리나라를 지켜 준 그들의 피와 눈물을 생각하며 무거운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재형 편집장

위 글은 교회신문 <4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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