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7-13 18:48:35 ]
장마철이다. 올해는 비가 많이 오겠다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지만 보란 듯이 빗나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쬔다. 이른바 마른장마다.
엊그제 요란한 장맛비가 내린 후 모처럼 시야가 탁 트였다. 하늘은 높푸르고 구름은 표백한 듯 하얗다. 멀리 있는 산도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영롱하게 제 빛을 뿜는 가로수를 따라 걷다가 종종 이용하는 마을버스가 급정차 하는 모습을 본다.
주위를 살펴보니 ‘영상 단속 중’ 이라고 쓰인 작은 입간판이 서 있고 가까운 곳에 교통경찰이 정복 위에 형광색 조끼를 입고 서 있다. 배차 시간이 안 맞았는지 급하게 달리던 마을버스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멈춘 모양이었다. ‘쳇, 이게 권세라는 거구나’ 싶으니 씁쓸한 반면, 과속 사고의 뒷덜미를 잡았다 생각하니 우리 사회는 어쩌면 적당한 규제가 있어야 더 잘 돌아가는 건가 싶다.
우리 집 화단의 수국이 연보랏빛, 푸른빛, 청보랏빛으로 절정인데 이웃 아파트에는 자줏빛으로 곱다. 마음까지 예뻐질 심산인지 향기도 없는 꽃에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탐하다가 이제 막 팝콘 터지듯 피어나는 목백일홍에 눈을 빼앗겼다. 얼마 전 찬란한 장미의 계절이 가고 온통 푸르기만 한 신록에 지쳐 있던 차에, 마치 격려하듯 ‘얘, 이제 네가 필 차례야, 알지?’ 하며 몇 번인가 같은 나무에게 말했는데, 참말 그 나무가 내 응원을 듣고 진홍색 꽃을 착실히 피워 낸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 기특한 맘에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이렇게 자연도 관심을 가지고 대하면 귀를 열고 움직이는구나, 이런 게 교감이라는 것인가.
나는 성령님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있나, 생각하며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키 작은 초목 둥근 잎사귀 끝이 죄다 시커멓다. 공기 중에 있던 미세먼지가 내려앉은 것이다. 이제 저 앞 식당에 보랏빛으로 익어 가는 블루베리는 포기해야겠네. 남모르게 홀로 따 먹던 오디며 무화과에 올해는 블루베리까지 있어 웬 횡재냐, 하며 좋아했건만 말이다. 포도가 알알이 익어 가는데 눈만 호강하게 생겼다. 혀는 건강을 위해 삿된 욕심을 내려놓았다!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는데 잠자리 한 마리가 여유롭게 비행한다. 앗, 잠자리다. 이제 곧 매미도 보이겠구나. 나는 왜 해마다 매미를 기다리는가. 목 놓아 짝을 부르는 노래가 애처로우면서도 내 귀가 영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려져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는 표현이 맞겠다.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지막 변태를 거쳐 드디어 제 사명을 다하려고 애쓰는 매미가 기특하다. 열흘에서 길어야 보름 사이에 존엄한 명제를 완수해야 하는 매미를 응원한다. 또 나는 내 사명을 직시하고 있나 곱씹어 본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와 나들이를 나섰다. 여러 사정상 가뭄에 콩 나듯 해도 웬만하면 요양병원 앞 테라스에라도 함께 나가 잠깐 해바라기를 하려고 한다. 지나가는 차도 보고 사람들도 보면서 어디 먼 시골에 갖다 버리지 않았나, 하는 노부(老父)의 의구심을 해소해 드리려는 마음에서다. 요사이는 신장 암 증상인지 얼굴이 종종 부어 계신다. 아닌 게 아니라 소변에도 피가 섞여 나온다고 한다. 얼마를 더 사실지 마음이 다급해진다. 살아 계실 동안 좀 더 마음을 쏟자, 한 번 더 찾아뵙자, 스케치북에 부지런히 말씀을 써서 읽으시게 하자, 새롭게 다짐해 본다.
정성남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8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