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7-25 11:45:44 ]
“쯧쯧쯧. 에휴.”
내 한숨에 중학생 딸아이가 눈치를 살핀다. 이내 “아빠는 왜 그렇게 맨날 한숨을 쉬어요?”라고 묻자 “너 때문에 한숨이 나와”라고 말해 아이의 말문을 막았다. ‘종합적’으로 맞는 말이다. 중학생 딸아이를 둔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백번 공감할 것이다. “너 같으면 한숨이 안 나오겠니?”라고 버전을 바꿔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자 옆에 있던 아내가 살짝 눈치를 준다. 더 확실하게 혼내라는 사인인지, 그만하는 게 좋겠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쯤 되면 ‘정말 사소한 것에 화만 내는 아빠 싫어’라는 딸아이 마음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해야 되는 확실한 훈계를 하는 것도,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지만 자식 교육은 잘못할 수 있다. 모든 부모가 아이를 망치지 않길 바라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망치는 일인지 딱히 구분할 수 없다. 아이들의 다양성만큼이나 교육 방법론도 제각각 아닌가? 기준도 모호하고 대립적인 의견도 많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 눈높이에서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라며 어린 자식들에게 무분별한 존칭어를 쓰기도 한다.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 나고, 모두가 최고의 교육 전문가란다. 심지어 자녀 교육에 유행도 있다.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최근 내 모습을 분석해 보니 두 가지가 뚜렷했다. 첫째는 ‘믿음의 훈계를 가장한 잔소리’가 너무 많았다. 꼭 필요한 잔소리지만 딸아이들을 위해 우선 기도하지 못했기에 영적으로 지는 싸움을 했다. 작정하고 매를 들어도 그때뿐. 하지만 주님께 기도하고 나서 아이들을 대하면 감정이 격해지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발하는 아이들을 잠잠케 할 지혜를 주님이 주셨다. 사용하는 단어부터 달랐다. 그런데 그냥 잔소리인 경우에는 화가 화를 부르고, 상처가 상처를 후벼 팠다. 그때 깨달았다. 부모가 아이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은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 힘든 척’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숨을 쉬는 것인데 아이는 한숨이라고 여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습관이 되었나? 힘든 것을 힘들다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올바른 신앙인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천국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사는 것 아닌가. 항상 피곤해하고, 한숨 쉬고, 짜증내는 아빠의 모습에서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 아빠를 보는 아이들도 힘들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요즈음 잘 웃지 않는 아빠다.
성경은 죄를 지적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부모로서 자식을 경책할 윤리도 알려 주셨다. 아빠로서 부족할 때가 많겠지만, 아이들이 잘못하면 적당히 타협하고 싶지 않다. 치마가 짧으면 짧다고. 얼굴에 화장기가 있으면 지우라고. 버릇 없이 굴면 공손하게 하라고. 비록 아빠 눈 밖에서는 치마를 접어 입고, 갈아입고, 화장을 다시 하더라도 얘기하고 또 얘기할 것이다. 스마트폰 사 달라고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절대 사 주지 않을 테다. 친구들 폰을 빌려 와서 몰래 하면 뺏고 또 뺏을 것이다. 옷을 사 주는 사람이 아빠고, 먹을 것을 사 주는 사람이 아빠고, 그 질서에 순종하기를 요구하고 또 요구할 것이다. 그냥 난 무식한(?) 아빠가 되겠다고 작정한다. 다만 기도하고, 절대 흥분하지 않겠다.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너무 힘들다고 하지 않겠다. 아빠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힘낼 것이다. 각오해라 딸들아.
/김기환 집사
(고등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4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