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8-29 14:48:01 ]
고등부에서 함께 충성하는 선생님에게 막 돌 지난 아들이 있다.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이 아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이자 관심 대상이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서로 안아 보려고 한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잘 안기고 잘 웃으면서 내게는 그러지 않는다. 내가 쳐다보면 얼굴을 돌린다. 왜 그럴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어린아이랑 안 맞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부 사무실에서 선생님들과 주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얼떨결에 안았는데, 아기는 내 품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남자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아기가 안 좋아하지”라면서 아기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저만치에서 평소 볼 수 없던 독특한 표정과 특이한 목소리를 내며 아기와 놀기 시작했다. 총각 선생님이 그렇게 잘 놀아 줘서 놀랐다. 그동안 논리·분석적인 냉철한 이미지와 정반대 모습에 두 번 놀랐다. ‘민망하지 않나? 부끄럽지 않나? 어떻게 저렇게 행동하지?’ 그 모습을 보며 계속 생각했다. 물론 아기는 선생님 곁에서 계속 즐거워했다.
하루는 그 아기 집에 찾아갈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식사 준비하는 동안, 아기와 놀아 줘야 했다. 아기가 엄마를 찾지 않게 최대한 아기 수준에 맞춰 놀아 주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를 변조해 동화책을 읽어 주고, 노래도 불러 주고, 장난감 갖고 신나게 놀아 줬다. 혹여 놀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미리미리 위험한 물건을 치웠다. 또 포도 먹는 모습을 애절하게 쳐다보기에 포도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아기의 마음을 얻어야 했고, 아기는 나와 있으면서 절대 다치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이 아기는 마음에 안 들면 울어 버렸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께 경의를 표한다. 나는 고작 한두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어머니들은 온종일 아이와 함께하며 아이 키운다고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아이들 밥 먹일 때 자기들은 밥을 못 먹는다.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있다. 이러한 노력과 수고와 희생에도 끝까지 아이를 키우는 이유는 사랑해서일 터다.
담임목사님께서 “자녀는 부모의 생애이자 인생”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그 아기와 함께한 짧은 시간은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보게 했다. 예전에 ‘주님이 맡겨 주신 사람을 아이 다루듯이 섬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아기의 마음을 얻고자 최대한 맞춰 주려고 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행동을 자세히 살폈고,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 조그마한 반응에도 맞장구쳐 주고, 아기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내가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행동들은 어떠했나. 맞춰 주려 하기보다 내가 아는 대로 행동하려 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살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을 위한 섬김이라기보다 내 중심대로 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결국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나는 정반대로 살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그런데도 전도되고 주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오직 주님이 하셨기 때문임을 다시금 고백한다. 이제 깨달았으니 나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다.
/강유림 교사
고등부
위 글은 교회신문 <49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