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11-14 14:57:51 ]
젖을 찾아 몸부림치는 아이 보며 영적 생존본능 사라진 신앙 깨닫게 돼
치열한 영적 싸움 승리하려면 기도생활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16개월에 접어든 둘째 딸이 30분째 울어댄다. 때론 서럽게, 때론 악을 쓰면서. 둘째 딸은 지금 ‘젖떼기’ 훈련 중이다. 울상인 모습이 안쓰럽지만 지금 물러서면 며칠이 될지, 몇 주가 될지 모를 일이라 꾹 참았다. 늦은 밤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자장자장 우리 아기, 빨리 자라 자장자장” 자장가를 불러주고 등을 토닥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우웩” 하며 울다 토하는 바람에 결국 젖떼기는 실패.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마지못해 젖을 물리니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마냥 엄마 젖을 물고 살 수는 없는지라 이제는 떼야겠다 싶었다. 또 밤마다 찾아대는 통에 서너 번씩 예사로 깨니 늘 피곤했다. 며칠 전부터 “세움이는 찌찌 먹는 아기 아니야, 이제 안 먹어”라고 말해 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름 싫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이 편에서 보면 신생아 때부터 지금까지 의지했던 생명줄 같은 ‘찌찌’를 쉽게 포기할 리 없을 것이다. 심심할 때 물고, 아플 때 물고, 울 때, 밥 먹다가 목이 마를 때, 졸릴 때도 물었던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큰아이도 그랬다. 시큼한 식초, 쓰디쓴 익모초를 발라보아도 죽겠다고 울면서 끝까지 물었으니 아이들의 생존본능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랬을까. 그런데 이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희미해지나 보다. 삶에 적당히 요령이 생기고 선택할 폭이 넓어지면서 편안한 것, 육신에 좋은 것을 찾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피로가 계속 쌓이거나 지칠 때면 슬며시 ‘꼭 이렇게까지 신앙생활 해야 해?’라는 생각마저 불쑥 들어온다.
‘퇴근하고 아이들 챙겨야지. 무슨 기도야. 다른 집 애들은 9시면 자잖아. 큰 녀석 키 작은 것 좀 봐. 요즘 큰 애 책 읽어 준 적 있어? 바보 만들래? 한글도 슬슬 가르쳐야지’라는 세상 기준의 생각. ‘어차피 예배 빨리 가도 자모실에서는 말씀 집중해 못 듣잖아. 피곤한데 천천히 가’라는 정욕적인 생각.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쭈뼛쭈뼛할 거면서 전도 괜히 나왔네’라는 불신앙의 생각까지. 이 생각들이 꽉 조여 있던 신앙생활을 한순간 느슨하게 하여 예배도, 기도도 다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로 만들어버린다.
둘째 아이가 젖을 찾아 몸부림치듯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살아야겠다, 천국 가야겠다’는 생존본능이다. 이 생존본능이 정욕적인 생각, 육신의 생각, 불신앙의 생각을 다 이기고 신앙생활 할 동력을 불어넣는다. 오지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던 TV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영적세계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생명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오지에서조차 살아남을 수 없이 연약하고 게으르며 나태한 사람이니 큰일이다.
“사랑하는 연세 가족들이여 기도하자! 주님은 우리가 망할까 봐 노심초사 기도하래요. 갑작스런 그 날 영혼의 때를 위해 생명처럼 기도해요.”
시대는 급변하고, 언제 위기에 봉착할지 모르는 지금, 내 영적인 생존본능을 일깨우는 담임목사님의 문자메시지가 더 애절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힘주어 혼잣말을 내뱉어본다. 오늘따라 기도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김은혜 집사
75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55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