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4-18 11:02:49 ]
몇 년 전 이사하면서 오래된 장롱을 버리고 붙박이장을 설치했다. 붙박이장 재료와 작업 공구가 차 한 대 분량이 넘었지만 기술자는 한 분만 오셨다. 승강기가 없는 4층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게 문제였다. 옆에서 도우려고 했으나 기술자는 자재가 크고 무거워 위험하다며 그 많은 짐을 혼자 날랐다. 치수에 맞춰 자르고 모양을 잡아가는 손놀림이 얼마나 능숙한지 마치 고양이 쥐 놀음하듯 했다. 도울 것도 없고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부담스러워 점심과 간식을 대접하고는, 마치는 대로 전화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오후에 다시 집에 와서 보니 방마다 기계톱에서 나온 톱밥으로 온통 뽀얗게 덮여 있고, 크고 작은 작업 부산물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닦고 치울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기술자 입장이야 붙박이장만 설치하면 되지만,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더러움을 줄여 줬더라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한편 고생하신 것을 고려해 섭섭잖게 수고비를 드렸다.
최근 들어 당시 만든 붙박이장 하나를 다른 방으로 옮기게 됐다. 붙박이장을 해체하던 기술자가 “주인아저씨, 이리 좀 와 보세요” 한다. 천장과 붙박이장 사이 가렸던 부분을 뜯어내고 있었는데 예전에 작업한 분이 가져가지 않고 밀폐 공간에 숨겨 둔 폐자재가 해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순간, 그 당시 기술자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섭섭함과 깔끔치 못했던 뒷마무리 모습까지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붙박이장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가린 공간은 외부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자신의 행위는 절대 드러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7).
육신의 세월이 끝나는 순간,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삶이 주님 앞에 드러난다. 깊숙이 감춰놓은 수많은 죄악과 허물, 누구도 모르고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수치와 은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속죄받을 기회를 잃은 영혼은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전염병 코로나19는 빈부격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냈다.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들려오는 우울하고 암담함은 화창한 봄날에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2~3).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켜켜이 쌓인 더러움이 은혜의 보혈로 씻겨 거룩한 천국 백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들러붙은 피딱지로 인해 떠지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더는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윤웅찬 집사
14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67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