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03-21 21:44:23 ]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수단 좋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잘 알고 있어 집을 사고, 사업을 확장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노후를 설계하는 것에 푹 빠져 삽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같은 일에 몰두해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시대 임금이 먹지 못하던 음식을 먹기도 하고, 입지 못하던 옷을 입기도 합니다. 또 자기 차를 운전해 먼 거리까지 쉽게 오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옷이 없고 가난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 앞에 놓인 팥죽 한 그릇과 같습니다. 인간다운 소중한 가치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배고픔 앞에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책임감도 심지어 신앙까지 다 팔아먹은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매인 인생이요,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소중한 장자권을 팔아 버린 영적 무지 탓입니다.
요즘은 각 가정에 자녀가 많지 않으므로 장자라는 말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유대 사회에서 장자의 명분은 곧 하나님의 축복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상속을 할 때도 장자를 중요하게 여겨 장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뒤로한 채 배고픈 것을 당장 해결하겠다는 에서의 생각을 돌아봅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25:32).
여기에서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꿔 읽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아버지고 하나님이고 무슨 상관있나? 명분이고 의리고 무슨 양심 타령이냐?’ 지금 먹고사는 게 최선이라는 말입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먹고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빵만으로 산다는 생각과 빵에게 내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는 점입니다.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에서는 자신의 삶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물질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는 자기 눈에 유익하게 보이는 것만 가지고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전형적인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실 자리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버지가 하나님께 빌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문을 닫아 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 이삭은 에서에게 한다고 축복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이 축복을 받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때를 위해 영적인 것을 우선하며 살아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4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