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10-17 20:35:55 ]
‘미운 일곱 살.’ 일곱 살 전후로 말썽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때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올해 다섯 살인 장난꾸러기 큰애가 앞으로 여섯 살, 일곱 살이 되면 얼마나 더 내 속을 박박 긁을 것인가.
며칠 전에도 엄마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 있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려면 좀이 쑤시나 보다. “가만히 좀 있어”, “뛰지 마”, “뛰지 마!”, “엄마가 뛰지 말라고 했다!”, “제발 좀! 얌전히…야!” 당시 상황을 문장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어린 자녀를 키우는 자모들이라면 엄마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날에도 ‘똥고집’이 아주 드셌다.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는데 기어코 샌들을 신고 밖에 나가겠단다. 현관문 앞에서 승강이를 벌이기를 10분, 20분. 외출 준비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될 만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억지로 신발을 신기자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아이 모습을 보며 기운이 쭉 빠졌다. 나도 속상하고 아이도 속상하고. 하루라도 쉽게 넘어가는 날이 없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육아 프로그램에서 ‘금쪽이’들을 상담해 주는 박사님이 조언을 건넨다. “사람은 누구나 발달 과정에서 일정한 불균형을 겪는데, 그 불균형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고 그에 대한 정답은 바로 ‘포용력’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러나 개구쟁이 우리 아들을 대하는 육아의 현장에서는 왜 저 말이 그저 이론만 되는지.
저녁에 기도하러 교회에 와서 하루 동안 큰애와 투닥이던 내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한 장면, 한 장면 후회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때 한 번 더 참을걸. 좀 더 차분하게 타이를걸. 울그락붉으락한 얼굴로 “하지 마!”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한 번 더 알려 주고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부드럽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좁아터진 내 마음, 초라한 나 자신을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오랜 세월 나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심정이 내 마음 문을 두드린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라고 하셨다. 죄인인 내가 내 허물과 잘못을 깨닫고 주께 돌아오기까지 끝까지 참아 주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큰 사랑을 받아 놓고도 나는 얼마나 사랑 없이 내 아이를 대했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마침 유아부에서 진행하는 기도모임을 마치고 엄마가 기도하는 자리로 돌아온 큰애가 방긋 웃으며 말한다. “아까 엄마한테 떼쓰고 고집부린 거 잘못했어요. 엄마 사랑해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나와 달리, 아이는 금세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 마음이 복잡해 아이의 머리만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 주일은 총력전도주일이었다. 내 자녀 하나 넉넉히 품지 못하는 나이건만 주님께서는 섬길 이를 맡겨 주셨다. ‘끝까지 사랑해 보자. 주님처럼 품고 섬겨 보자’라며 주님께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미천하고 여전히 죄 많은 적은 그릇이지만 크신 주님이 사용해 주시리라. 주님, 감사합니다.
/현정아 객원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77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