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나

등록날짜 [ 2024-09-30 14:08:59 ]

시간은 조용하다. 지나가는 소리도 없다. 흔적도 잘 남기지 않는다.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도 귀 기울여 보나 무음(無音)이다.


그러나 수십 년, 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시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시간의 흐름이 겉으로 드러난다. 아무개의 얼굴과 손과 발과 피부 그리고 치아부터 뼛속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흐름이 나타난다. 목소리 또한 칼칼해지고 머리털이 가늘어지고 눈도 침침해지는 등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다.


제일 무서운 것은 마음에 움푹 파인 시간의 흔적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심령에도 타격을 준다. 온갖 세파(世波)에 시달리느라 상처 입고 멍들고 깨지고 닳아 버린 마음속 심령에는 노곤한 세상살이가 담겨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시간의 흐름을 체감할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다. 줄어드는 시간 탓에 초조해지고,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얄궂은 행태를 항의할 곳도 마땅치 않다. 나 나름대로 조용히 생각하기도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만 의지해 조용히 기도하며 내 마음을 달래 본다. ‘나름대로 바지런 떨며 힘내 보자’,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며 끝까지 희망 있게 근심하지 말자’, ‘내 영혼아 힘내!’라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붙들도록 격려하고 위로한다.


어느 순간 내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간에게도 고마워 인사를 건넨다.


‘시간아, 너도 생각이 있을 거야. 조용해서 그렇지, 난 네가 똑똑하고 이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하다는 것을 알아. 지금도 너는 소리 없이 열심히 지나가고 있잖아. 사람은 누구든 어려움이나 큰일이 생기면 잠깐 멈춰 서기도 하지만 너는 쉬는 일 없이 지금도 가고 있어.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는 날에는 시계 속에 담긴 널 열 번도 더 쳐다보며 약속을 되새기지. 분명히 다가오고 정확하게 다가올 너를 믿고 있기 때문이야. 네가 부지런히 지나가니 나 또한 매일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또 너 때문에 귀한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과 정한 시간에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어. 귀하고 복된 시간을 조금도 흘려 버릴 수 없어. 시간아, 멈추지 말고 계속 가줘. 영광의 그 날까지. 내 주님을 만나 영원히 행복할 그 날까지 계속 가 줘. 부지런한 너처럼 내 영혼의 때를 위해 나도 부지런할 거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이윤식 (14교구)

위 글은 교회신문 <8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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