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6자 회담이 공동발표문을 채택하며 끝난 지 하루 만인 지난 21일 북한은 경수로를 먼저 제공해야 핵확산금지조약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 기구의 사찰도 받을 수 있다며 회담 결과에 또 다시 먹구름을 드리웠다. 미국 등 회담 당사국들의 반응은 원망이나 비난을 넘어서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한 때 효과를 발휘했던 ‘벼랑 끝 전술’은 수를 읽힌 지 오래고 북한은 갈수록 더 궁지에 몰리고 있다. 북한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조금 호흡을 길게 하고 북한이 처한 국제 환경을 보자.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지구상에서 북한 편을 들어줄 나라는 거의 없다. 사회주의 모국이라던 소련은 망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경제난에 시달리는 러시아는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처지여서 북한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혈맹이라던 중국은 이미 나라의 90% 정도가 자본주의화되었고 과거와 달리 북한에 대해 크게 인색해졌다. 무력적화통일의 대상으로 만만히 보았던 남한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교역 규모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수교한 이후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는 남한에 군사무기까지 판매할 만큼 한·중, 한·러의 밀착 관계는 북한이 시기를 넘어 두려워하는 수준이다. 이처럼 불리해진 환경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려면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는데 수교는 고사하고 아직 적대관계조차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핵을 무기로 미국에 대해 협박 반, 사정 반, 적대관계만이라도 청산하자고 애원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성과는 없다.
북한의 국내환경은 어떤가?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아직도 수많은 주민들이 살 길을 찾아 국경을 넘고 있지만 북한 당국은 벌써 몇 년째 이를 막지 못하고 있다. 국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를 정상적인 국가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이다. 북한이 내세워온 정체성은 ‘자주’요, ‘주체’요, ‘우리식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이를 유지해온 주요 버팀목은 ‘미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 ‘남조선 괴뢰’에 대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존립을 위해 미국과 남한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삼가고 구걸하다시피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주민들에게 언제, 어떻게 정확히 설명해야할 것인가? 생존을 위해서는 개방으로 나아가야하지만 북한에게 개방은 체제 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독약과도 같은 것인데 밖에서는 문을 열라고 성화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유일지배체제 아래서 50여년을 엄격한 사상적, 물리적 통제로 버텨온 북한체제의 내구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먼저 개혁개방의 길을 걸은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같은 대규모의 반체제적 사건이 평양에서 일어난다면 북한은 견뎌낼 수 있을까? 조선왕조, 일제시대를 거쳐 왕조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인지배체제 아래서만 살아온 북한 주민들에게, 전혀 생소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람이 여과 없이 불어 닥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북한보다 훨씬 덜한 독재를 경험했다는 남한이 개방사회로 나아가면서 광주민중항쟁과 6.29 등 혹독한 시련과 고비를 넘긴 점을 상기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북한의 처지를 동정하자는 게 아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아직도 남한 사회에는 소련 붕괴와 함께 용도 폐기된 냉전적 시각에서 북한을 다루려는 사람들이 많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때 천 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북한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북한과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할 것인가? 막연히 통일을 꿈꾸기에 앞서 북한에 대한 달라진 시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기도가 절실한 때인 것 같다.
위 글은 교회신문 <7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