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이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탐욕이 초래하는 비극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가난한 소작인 바흠은 악마의 장난에 의해 조금씩 땅을 얻게 되며 생활도 차츰 풍족해지지만 땅이 넓어질수록 욕심도 커져간다. 그러다가 바흠은 어느 비옥한 유목지를 소유할 기회를 얻는데 하루 동안 걸어 다니며 표시를 한 땅이 모두 자기 것이 되는 이상한 조건을 제시받는다. 능력만 있으면 엄청난 땅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계약에 의하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 멀리 뛰어 다니던 바흠은 마침내 체력이 소진되어 죽는다. 죽은 후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쳐 쓰러진 육신이 묻힐 수 있는 한 평 땅이 전부였다.
어리석은 바흠의 예화는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바흠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체력이 감당할 만한 분량의 땅만 돌고 왔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되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질을 얻을수록 탐욕에 사로잡히고 더욱 더 안락한 삶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현대 정신분석이론에 의하면 욕망은 인간의 본성자체이고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결여에서 비롯된다. 욕망이란 무엇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착할수록 결여는 더욱 커진다. 실제로 우리는 재화가 많아지고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욕심도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을 많이 본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은 당장 내일 먹을 양식에 대해서만 걱정하지만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불려 나갈까를 더 고민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재화가 넘치고 풍요가 가득하지만 생활의 여유가 새로운 과소비와 과잉 사치를 낳으면서 더욱더 물질에 매이는 소비사회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명품사기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최소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빠듯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한쪽에서는 수 천 만원에 달하는 명품시계를 사들이고 자신의 몸치장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이 상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 속에 인간을 밀어 넣는다.
그러나 성경은 탐욕이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물질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 욕심이 더 큰 욕망을 낳고 이것이 인간의 눈을 멀게 만들어 결국엔 어리석은 바흠처럼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이다.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유한자인 우리의 운명을 자각하고 당장이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나그네처럼 살 필요가 있다. 나그네는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즐기지만 그것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