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베이컨은 거미, 개미, 꿀벌의 특성을 비유로 삼아 세 종류의 사람을 구분하였다. 거미줄로 덫을 놓아 약한 곤충들만을 잡아먹고 사는 거미 같이 해로운 사람,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결국 자기밖에 모르는 개미 같은 사람, 마지막으로 부지런히 꿀을 모아 남에게 유익을 주는 꿀벌과 같은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곤충들의 자연적 본성을 사람의 윤리적 평가에 맞출 수 있느냐의 문제는 있지만 하나의 비유로서 인간관계에 적용해서 생각할 만한 가치는 있다.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참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어려운 설명 대신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었다. 너무 유명한 이 일화에서 예수는 세 종류 사람의 전형을 예시적으로 언급하고 극한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인간 윤리의 본질을 제시하고 있다. 이웃에게 강도짓을 하고 죽을 만치 때려 목숨을 위태롭게 한 강도는 의심할 바 없이 거미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가져오는 해악을 굳이 도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나머지 두 유형인데 예수가 하필 레위사람(제사장도 마찬가지다)과 사마리아 사람의 대비를 통해 선한 이웃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레위사람은 개미에 비유될 수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레위인은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독점적으로 감당하는 신성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일화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린 레위사람이 공적인 제사 때문에 불쌍한 이웃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고 짐작해볼 수도 있다. 아니면 레위인은 죽어가는 불쌍한 이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채 지나가면서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레위인은 강도와 달리 당시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이 레위인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오히려 레위인의 행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따돌림을 받는 최하층 족속이었다. 아마 사마리아 사람도 중요한 볼일이 있어 여리고로 가는 그 위험한 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신의 일을 뒤로 한 채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까지 데려와 뒷수습을 부탁한다. 더불어 안면도 없는 이 사람을 위해 나중에 다시 주막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예수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과연 누구이고,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윤리적 모델이 무엇인가를 이렇듯 세 유형의 인물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윤리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그것도 이웃이 어려울 때 자기 상황을 초월하여 이를 돌보라고 말한다.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선량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언제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고 이웃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위 글은 교회신문 <9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