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중간선거와 북핵

등록날짜 [ 2006-11-29 09:35:09 ]

미국 중간 선거가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 6년에 대한 신임투표였던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함으로써 미국은 12년 만에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게 되었다. 소련이 사라진 이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선거 결과에 각국들은 촉각을 기울이며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고 남북한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부시 행정부의 중간 선거 참패를 신속하게 보도했다. 또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즉 조총련은 도쿄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어 북한과 미국의 양자대화를 촉구해온 민주당의 승리를 환영했다. 한국 역시 취임 초부터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강압 전략으로 일관해 온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가 적절한 것인가는 재고의 여지가 많다. 민주당의 승리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민주당이 대북정책에서 공화당에 비해 유화적이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판단 때문이다. 민주당이 대외정책에서 공화당보다 유화적이라는 평가는 지속적으로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주장해왔으며 지난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통해 북-미 제네바 합의를 타결해 북-미 핵 위기를 일단락 지었다는 데서 연유한 바가 크다. 하지만 내막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민주당이 공화당에 비해 더 유화적이라는 평가는 근거가 희박하다.

지난 94년 6월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당시 미국은 북한을 강압전략으로 일관하며 몰아친 끝에 한반도를 전쟁위기로까지 몰고 갔었다. 구 소련 붕괴 이후 북한 핵 문제가 국제사회의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이후 클린턴 행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워 북한 핵과 핵 프로그램의 완전 폐기를 요구하며 집요하게 압박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처음부터 북한과 대화할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에 나선 것은 93년 3월, 당시로서는 핵 실험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인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한 이후 NPT 체제 방어를 위해 다급해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북한과 고위급 회담을 시작했지만 대북 제재는 항상 정책의 우선 순위에 올라있었다. 북한은 경제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선언했고 미국은 북한과의 무력충돌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 국방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민간인 1백만명 이상 사상, 6백억 달러가 넘는 전쟁비용, 1조 달러에 이르는 한국경제의 피해를 예측해놓고 있었다. 당시 미국측 회담 대표였던 갈루치는 94년 4월에서 5월 사이 클린턴 대통령과 외교정책 보좌관들이 대북 전쟁 준비에 보다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었다. 당시 카터와 김일성의 담판이 없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당시 카터는 미국의 정책에 역행했다는 이유로 클린턴은 물론 보좌관들로부터 비난과 냉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라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민주당은 공화당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라면 공화당이 북한과의 대화조차 기피하는 데 비해 민주당은 직접 대화를 적극 수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화에서 진전이 없을 경우 민주당 역시 군사적 대응을 포함해 강압전략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에게든 공화당에게든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은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가 아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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