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속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착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 사람도 자식을 낳고 길러보기 전에는 나를 키운 부모의 애틋한 심정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부모가 되고 아이에 대한 부성을 경험한다고 해서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도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자기자식은 끔찍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부모를 박대하고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핵가족이 일반화되면서 2대, 3대가 한집에 사는 가정을 보기가 점점 힘들다. 고령의 병든 부모가 혼자 힘겹게 살다가 죽은 지 며칠이 지나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가끔 들을 수 있다. 자식은 물고 빨고 하면서 부모에게는 그 십분의 일의 애정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다.
부모가 된다고 자신을 키운 부모의 심정과 희생을 저절로 알 수는 없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 악해서 라기 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거의 본능과 자기애적 동일시에 가깝다면 부모에 대한 사랑은 그보다 더 큰 초월과 깨달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가시고기가 그 전형이다. 가시고기는 어류 중 유일하게 둥지를 튼다. 수컷 가시고기는 모래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수초를 물어와 집을 짓고 암컷을 유혹한다. 암컷 가시고기는 알을 낳자마자 떠나버리고, 그때부터 수컷은 먹지도 않고 24시간 둥지를 지킨다. 그리고 새끼들이 알을 뚫고 나오면 수컷은 새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주변을 지키면서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지킨다. 죽어가는 가시고기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육신을 새끼들에게 내어주면서 짧은 일생을 마감한다. 새끼들이 아비의 몸을 뜯어먹고 힘을 얻어 떠나는 약 15일 동안 수컷 가시고기는 먹는 것도 잊은 채 사력을 다해 새끼를 돌본다. 새끼들이 자라나면 똑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미물이지만 그 행동이 너무 숭고하다 보니 가시고기는 부성의 상징물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가시고기는 자연이 부연한 생존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지, 숭고한 사랑의 실현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은 나의 분신처럼 생각되고, 내가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을 대신 충족시켜줄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온갖 애정을 쏟지만 자식은 나의 분신도 아니고, 나의 삶을 완성해주는 존재도 아니다.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들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 또 다시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며, 그렇게 세대는 반복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십계명에 있는 것은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뱀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지만, 부모를 공경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고 동물적일 수 있지만 치사랑, 즉 부모에게 향하는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치사랑이 없다는 말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내리사랑만큼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한번쯤 치사랑을 고민하고 반성하면서 5월을 맞아보자.
위 글은 교회신문 <11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