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의 일치

등록날짜 [ 2007-06-12 17:56:09 ]

대학시절 친한 같은 과 친구들과 설악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한여름 땡볕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연히 힘도 들고 목도 말라서 가다가 쉬곤 하였고, 그 때마다 일행이 가지고 있던 물병 하나를 들고 여럿이 돌아가면서 마셨는데, 그 마시는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친구는 얼마 남지 않은 물병을 자기 혼자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고, 다른 친구는 자기는 조금 목만 축이고 다른 친구들에게 곧 물병을 돌리며, 좀 더 힘들어 보이는 친구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를 보라는 말이 참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또 든다면 자동차를 운전할 때인 것 같다. 운전을 하다 보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운전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운전자의 실수에 대하여 집요하게 보복하려는 운전자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교회 지하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차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는 상황이었다. 필자의 자동차 앞에 여러 대의 차량이 끼어들려 하여 그 차들이 모두 끼어들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는데, 바로 뒤에 있던 차의 운전자는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좁은 틈을 비집고 나와 필자의 차를 추월하여 몇 대의 차량을 지나쳐 그 앞에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서로 같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다투게 되는 때에도 교회 안에서 보일 수 있었던 온유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만일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온유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고, 상대방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필자가 재판 과정에서 조정을 하여 본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금전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선한 사람이 더 손해 보게 마련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다고 확연히 느껴지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기가 더 쉬운 것 같다(이 말이 꼭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바보처럼 양보하고, 손해 보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유는 신앙과 삶, 교회 안의 삶과 세상 속의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교회와 세속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게 되면, 교회 일을 무조건 우선시한다는 명목 하에 세상 속의 삶을 소홀히 하며, 자기가 해야 할 세상의 일에 대하여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쉽고, 그럼으로써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기 십상인데다가, 오히려 세상에서의 나쁜 습관들이 교회 생활 속으로 침투하여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적으로 돌변하도록 만드는 등, 스스로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의 생활 속에는 성경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게 마련이고, 어찌 잘못 생각하면, 세상과 교회를 줄 타듯이 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오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좋은 향수라면 어디에 놓이더라도 좋은 향내를 풍기는 것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더라도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위 글은 교회신문 <11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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