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독재자 차우세스쿠, 체조 요정 코마네치, 드라큘라로 유명한 나라다. 우리와 별다르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 동유럽의 먼 나라지만 루마니아가 남북한에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1989년 12월 15일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특별군사재판에서 총살형을 당하기 전까지 루마니아는 한때 ‘발칸반도의 북한’이라고 불릴 만큼 북한과 대단히 유사한 정치 체제를 이루었던 나라다. 차우세스쿠는 북한 김일성 주석과 대단히 각별한 사이였다. 71년 첫 북한 방문을 시작으로 89년 총살당하기까지 4번이나 북한을 공식 방문한 차우세스쿠는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시내까지 100만 인파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일사분란하고 현란한 군중들의 환영에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에도 북한식 공산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부쿠레슈티 대학의 한 교수는 차우세스쿠가 북한을 다녀온 이후 루마니아 국민들이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를 북한과 같은 일사분란한 전제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부인 엘레나 차우세스쿠를 제1부수상에 앉히고 아들 니쿠 차우세스쿠에게 정권을 물려줄 구상을 하며 부자세습을 계획했다. 친인척 40여 명에게는 국가 요직을 나눠주어 강력한 족벌체제도 구축했다. 또 전국의 고아원에서 선발해 키운 고아 출신 2만 명으로 친위대를 구성해 자신을 지키도록 했다. 이 친위대와 비밀경찰은 정적들과 반대파, 국민들을 감시하고 고문하며 온갖 악행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1983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차우세스쿠는 북한 인민문화궁전을 본후 영감을 얻고 돌아와 유럽식으로 거대한 인민궁전을 건설했다. 당시 유럽의 최빈국이었던 루마니아는 11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었지만 차우세스쿠는 권력기반을 더욱 다지기 위해 무려 80억 달러를 들여 인민궁전 건설을 강행했다. 이 인민궁전은 단일 건물로는 미국의 국방성 건물인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규모다. 인민궁전을 건설하면서 수백 채의 집들과 교회, 성당 등이 철거되었고 주민들은 쫓겨 나갔다. 또 북한은 외채가 한 푼도 없다는 김일성 주석의 말에 자극 받은 차우세스쿠는 각료들에게 모든 외채의 상환을 명령하며 모든 수입을 금지하고 먹을 것까지 내다 파는 기아 수출을 강행했다. 자신과 가족, 친인척들을 위해서는 국부도 아낌없이 쏟아 부으면서 국민들에게는 극도의 내핍을 강요했다. 결국 외채는 모두 상환되었지만 루마니아 전역에서는 반독재 민주화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갔다. 차우세스쿠는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수도 부쿠레슈티 혁명광장에서 대규모 관제데모를 벌였지만 이 관제데모가 반 차우세스쿠 시위로 돌변하면서 차우세스쿠는 총살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한 때 ‘유럽의 빵공장’, ‘동유럽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부강했던 루마니아는 2차 세계대전과 공산화, 차우세스쿠 독재를 거치며 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이 루마니아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도입된 지 17년이 되었다. 올해는 불가리아와 함께 EU에 가입하며 새로운 부흥의 꿈을 꾸고 있다. 외국인의 직접 투자가 늘고 국민 소득도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기업들도 한 몫하고 있다. 1990년 한국과 수교한 이후 루마니아는 한국의 도움을 원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양국 대통령이 오가기도 했을 만큼 관계는 긴밀해지고 있다. 북한과 대단히 유사한 체제를 유지했던 루마니아가 독재의 유산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길을 보며 북한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을까?
위 글은 교회신문 <1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