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9일, 서울 상도동 프레이즈예술신학교에서는 6월 25일 발생한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 사고로 숨진 이 학교 동문 박진완씨 추모 예배가 진행되었다.
“진완이는 세상의 성공을 좇지 않았습니다. 몸소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보여줬습니다. 인간적으로 슬픔을 억누를 수 없지만 세상이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믿습니다.” 이 학교 학장 박연훈 목사의 설교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멘’으로 화답했다.
고 박진완씨는 2003년부터 캄보디 아에서 ‘밥퍼’사역으로 유명한 다일공동체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고아들을 돌봐왔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관광 가이드로 취직한 후에는 월급을 쪼개 가난한 이웃들에게 급식을 제공해 ‘천사 가이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장래 목사가 되어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고자 꿈을 키워오던 젊은이였다. 평소 박씨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3장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였다.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탄식 속에 박 씨는 채 이루지 못한 꿈을 지인들에게 추억으로 남긴 채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로 하늘로 떠났다. 이런 슬픔을 겪다보면 우리는 불순종한 요나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하듯 되묻게 된다.
“왜 이런 꿈 많은 젊은이를 갑작스레 데려가시어 하나님의 사역을 좌절 시킵니까?”
박진완 씨의 경우같이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전혀 납득이 가지 않거나 혹은 원망스럽기까지 한 경우는 참으로 많다. 새벽기도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이웃에게 봉사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사기를 당하고 불행해진다든지, 아니면 질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끝내 치유를 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을 볼 때 이런 회의는 깊어진다.
특히나 교회 일각에서 믿음의 척도를 세상의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성공 혹은 건강한 삶과 동일시할수록 신실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불행은 평범한 우리에게는 더 이해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행여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보다 인간의 생각을 더 내세우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강변하지 않는지 심각하게 되물어 볼 일이다. ‘섭리’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다. 섭리란 인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적 계산이 작용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획이다. 개인의 처지나 인간의 상황논리로 볼 때는 납득되지 않아도, 긴 역사의 안목에서 그것이 옳았음이 밝혀지는 일은 종종 있다. 노예로 팔려갔다가 그것 때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의 운명이 전형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란 말이 있듯이, 삶이 뒤집어지고, 역사가 새롭게 평가되는 것은 비일비재다.
박진완 씨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의 못다 이룬 꿈이 못내 슬프지만, 그것을 통해 캄보디아 선교의 비전을 새롭게 다지는 또 다른 박진완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겸손하게 기도할 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1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