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한국인 인질 석방과 그 후폭풍으로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사이,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북한과 미국이 중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9월 1일과 2일에 열린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에서 북한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핵 시설을 불능화하는 대신 미국은 정치 . 경제적 보상 조치를 취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북미 핵 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농축 우라늄 의혹을 규명하고 영변의 5메가와트 흑연 감속로의 노심을 제거해 핵시설을 불능화하기로 한 대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고 적성국교역법에 따른 대북 제재를 해제하기로 합의하였다는 것이다. 북한측 회담 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조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현안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많은 일치를 보았다”고 말하고 미국은 약속한 정치경제적 보상 조치를 취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 역시 “북한이 올해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불능화하기로 했다”고 말해 북한의 핵 계획 신고와 불능화에 대해 서로 이견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번 북미 합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북한이 불능화의 시한을 올 연말까지로 분명하게 설정했다는 점이다. 북한이 이렇게 시한을 못박고 나온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며 전에 없던 일이다. 만약 북미간의 이 같은 합의가 사실이라면 북한과 미국 양측은 올해 안으로 핵 문제를 해결하고 본격적인 관계정상화의 과정에 진입하게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합의가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 보면 북한과 미국은 핵 위기 해결과 관계정상화에 상당한 진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시 북한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문제를 두고 북미간 기 싸움이 벌어졌다. 북한이 9월 3일자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의 삭제와 제재 전면 해제를 기정사실화 하고 나선 데 대해 미국 국무부는 테러지원국에서의 제외는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북한측 주장을 부인했다. 미국의 입장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릴 때도 법적 기준에 따랐듯이 삭제할 때도 법적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북한의 비핵화 과정이 더 진행되는 맥락 속에서 이 같은 조치가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 조선중앙 통신은 9월 5일 다시 미국의 강경보수세력이 북한을 계속 테러지원국으로 몰아 북미간 긴장을 조성하려고 한다며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호주 시드니 APEC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존중할 것으로 보인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APEC 각료회담에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송민순 외교장관에게 미국이 올해 2월 2.13초기행동조치 합의 이후부터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문제를 검토해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라크전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란의 핵 개발 문제까지 겹쳐 북한과의 핵 위기를 임기 내에 해결해 외교적 성과로 삼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이고 있다. 과거 핵 문제 등 걸림돌이 있긴 하지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미국 부시 대통령이 마음 먹고 통큰 결단을 내린다면 15년 넘게 지리하게 끌어온 북미간 핵 위기는 결정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볼 수 있는 시기를 맞고 있다. 북미 양측은 1994년 10월 역시 제네바에서 1차 북미 핵위기를 일단락 지었던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이후 13년만에 북미는 다시 제네바에서 2차 북미 핵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94년 제네바 합의는 북미 양측이 상호 불신과 지나친 신중함으로 시간을 허비하다 실기를 하고 말았지만 이번 제네바 합의에 대해서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좀 더 과감한 행보를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위 글은 교회신문 <11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