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 이래 ‘죽음’이야말로 유한자인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삶의 덧없음을 깨우쳐 주는 운명 자체였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평등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공평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인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자나 천덕꾸러기나, 아름다운 자나 추한 자나 언젠가 모든 것을 남겨 두고 이 땅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예외 없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으며 비켜가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늘 망각의 한구석에 죽음을 묻은 채 살고 있다.
하긴 손 놓을 데 없이 바쁜 치열한 삶 속에서 한가롭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환멸을 가진 염세주의자이거나 삶의 희망을 잃은 이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젊은이들에게 죽음이란 먼 미래의 일처럼 간주되면서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되곤 한다. 인생의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순간순간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 젊은이다운 패기로 인정되니 말이다.
그러다가 잘 아는 지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평소 외면하고 있던 죽음은 성큼 우리를 엄습한다. 이럴 때의 죽음은 늘 상실의 슬픔이요 고통으로만 다가온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잊히는 하나의 관행처럼 그렇게 죽음은 흘러간다.
그러나 좀 더 알차고 지혜로운 안목으로 살기 위해서는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유한한 인생의 끝이 있음을 인정하는 삶과 그것을 무시하는 삶은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이 나의 삶의 마지막이라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누구나 당면한 이익에 집착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난 삶에 대해 반성하고 미진했던 일을 마무리하려고 차분하게 노력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아마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클 것이다. 그러기에 철학자 플라톤은 “지혜로운 삶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삶이다”라고 했으며, 몽테뉴는 “철학이라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설파했다. 성경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장27)라고 말하면서 늘 죽음에 대비할 것을 강조한다.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는 전날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수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다. 물론 그 전광판의 목적은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준비하라는 경고 같아 보인다. 우리 옛말에도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언제 닥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체념적 태도나 경시가 아니라 죽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때 인생은 겸손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들이 긴 역사 속에서 고민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좀 더 진지하게 죽음을 준비하자.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운명을 직시할 때 인간은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고 절대자 하나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