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거리낌 없이 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돈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TV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 같은 것에서는 출연자들이 대놓고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일종의 터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절대적 평등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이니만큼 부자를 백안시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현재 위와 같은 세태는 많이 변하여서 돈에 대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 그다지 흉이 되지 않는 분위기의 사회가 되었다.
온 나라에 부자 되기 열풍, 돈 벌기 바람이 뜨겁게 불고 있다. 몇 년 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일본 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부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더니(이 책이 부자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일부 바로잡은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이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재테크에, 부자가 되는 데에 온 관심을 쏟고 있다. 대학가에서도 주식투자 동아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학생들 중 상당수는 인생의 목표를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정하고 젊은 시절부터 돈을 버는 연습을 하려고 노력한다. 로또와 같은 복권, 각종 펀드 등 금융상품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는 이와 같은 풍조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자 되기 대열에 합류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등의 말씀과 같이 성경에서 부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이 부 그 자체를 악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같은 취지로 가난한 것을 선하기만 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성경 레위기 19장 15절을 보면 이것이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라고 쓰여 있다. 세력 있는 자라고 옹호해서는 안 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가난하다고 무조건 그편을 들지 말라는 이 말씀은 가난이 부(권세)보다 선하다는 뿌리 깊은 우리의 상식을 깨뜨릴 만한 것이다.
가난보다는 열심히 일하여 깨끗하게 모은 재산을 하늘의 보화로 바꿀 재료로, 고아와 과부를 구제할 물질로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부가 낫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물신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슬쩍 눈을 감고 있지는 않은지가 문제이다. 그 부가 금식으로 주린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며 유혹하던 옛날의 사탄이 던져주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것만큼 큰 문제도 없다.
부자 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라는 세상 속담을 의지하여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며 신앙양심이 불의한 것이라고 외치는 수단을 슬쩍 합리화하려고 들지는 않는지,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불의에 대하여 예리하게 경종을 울려야만 하는 자신의 신앙양심이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퇴근길 길가에 있는 로또 판매점이 그대에게 손짓하여 부르지는 않는가? 그럴 때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이나마 불현듯 한번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그런 생각은 싹을 잘라버릴 일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