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와 한국

등록날짜 [ 2008-02-18 17:48:20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인연은 각별(?)한 데가 있다.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카터는 1977년 대통령에 취임하자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군’을 내세우며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과 미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한미 관계가 악화된 데는 1970년대 잇따른 주한미군 철군론에 안보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핵 무기 개발을 추진한 배경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후 미국의 집요한 감시와 압박에 핵 개발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의 손에 운명을 달리했지만 당시 한국 정부의 핵 개발을 포기시킨 주역이 부시 행정부에서 이라크 전을 주도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카터 전 대통령은 다시 한반도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차 북미 핵 위기 때이다. 1994년 6월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핵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군사적 압박을 추진한다. 당시 미국은 IAEA 탈퇴라는 초강수로 나오는 북한에 대해 ‘오시라크 옵션’을 적극 검토하고 있었다. 오시라크는 이라크의 핵 시설로 이스라엘은 1981년 이 시설을 공습해 파괴하고 이라크의 핵 개발을 좌절시킨 바 있다. 미국은 유사한 방식으로 북한 영변 핵 시설을 정밀 타격해 파괴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제재는 곧 전쟁’이라며 강력히 저항했고 상황은 험악해져 갔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민간인 소개 작전을 추진했으며 전쟁 징후를 알아챈 일부 외국인들은 서울을 떠나기 시작했고 외국기업들은 자체 철수 계획을 세웠다.
드리우는 전쟁의 암운을 한국인들만 까맣게 모르는 사이 카터는 1994년 6월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담판을 벌인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던 카터에 대해 북한은 대단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일성은 카터를 ‘의인(義人)’이라고까지 칭했다. 카터가 퇴임 이후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나서면서 북한은 거의 해마다 카터 센터 초청장을 보낼만큼 김일성은 카터를 좋아했다.
6월 15일 카터가 김일성과 담판을 벌이고 있을 시각, 미 백악관에서는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군 1만명을 한국에 추가로 투입하는 방안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위기가 확산·고조되어가고 있을 때 평양의 카터로부터 온 전화는 모든 것을 일순에 반전시켰다. 김일성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키로 했으며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항구적인 동결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카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방북에 동행했던 CNN에 나와 세계를 향해 이를 기정사실화해버렸다. 클린턴과 백악관은 카터의 돌출행동에 경악했다.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지만 민간인 자격으로 북한에 간 카터가 한마디 상의없이 미 정부의 정책을 일순에 뒤집어 놓았으니 카터에 대한 증오심까지 일었다.
화가 난 클린턴은 귀국한 카터를 만나주지 않았으며 귀국길에 워싱턴에 오지 말고 곧바로 애틀란타로 가라며 냉대했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한반도는 제2의 한국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카터-김일성 담판의 결과는 그 해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까지 이어졌다. 당시 카터의 방북, 김일성과의 담판이 없었더라면 한반도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카터는 전 미국 대통령 이전에 독실한 신앙인이다. 카터의 역할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율적이지 않은가?

위 글은 교회신문 <12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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