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서초동의 초등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딸아이와 함께 놀다가 거기서 뛰어노는 초등학생들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네다섯 명 정도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두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영어로만 대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어 발음을 들어보니 미국에서 살다가 온 아이들은 아닌 듯하고, 아마도 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이나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워온 것 같았다.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세계화 시대에 필수적이라는 영어 구사능력을 어린 시절부터 갖추고 있다는 자랑스러움보다는 한국의 영어교육 열풍이 얼마나 거셌으면 저렇겠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필자는 초·중·고교를 시골에서 다니면서 별다른 사교육을 받아보지 못하였고, 주로 독학하여 대학교에 진학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암암리에 “굳이 사교육 안 시켜도 공부할 사람은 알아서 공부하게 되어 있다”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벌어지는 조기교육, 사교육의 모습-특히, 그중에서도 영어교육-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생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영어공부를 시키려 드는가 하면, 만 3, 4세 정도의 아이가 학원을 10군데도 넘게 다니는 경우도 보았다. 예전엔 부모들이 당연히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할 놀이, 운동 등도 요즘엔 세분화된 각종 학원에서 모두 다 맡아서 해결해 준다. 가히 학원 만능의 시대라 할만하다. 그 대신 아이들은 뛰어놀 시간 없이 학원에 다니기 바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직접 대면하여 가르칠 시간이 적어졌으며, 그 결과로 아이들이 잘못할 경우에 지친 아이들을 징계하기보다는 오히려 달콤한 말로 달래기 일쑤이다. 부모들은 원어민 선생님의 발음에 따라 입을 오물거리며 영어를 말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에 무거운 사교육비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고, 부모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위와 같이 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학업 진도는 예전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빨라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 한자는 물론 영어 해독능력을 갖추고, 초등학교 과정 상당 부분을 선행학습하게 된다. 그래서 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사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위와 같은 사교육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고, 그것에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할 사회적 여건도 당연히 있다. 서구 선진국이 수십 년 동안 거쳤던 사회발전 과정을 단 몇 년 만에 겪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남보다 빨리 앞서서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덕택에 우리 사회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초고속으로 발전해 왔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와 같은 사교육의 광풍에 휩쓸려 부모로서 주의 말씀으로 자녀를 교육할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신앙적 교육은 교회가 모두 맡을 터이니 부모들은 세상 교육에만 치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주 그릇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구절만 보아도 성경은 부모들에게 교육의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장 6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언 29장 17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장 4절).”
위와 같은 말씀대로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그 자녀가 올곧은 그리스도인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소원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