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이다. 이 용어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며 대북 강경책을 구사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정상회담에 집착했고 카터를 통해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계획 일정을 성사시켰지만 94년 갑작스런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됐다. 한 대북 전문가는 김영삼 정부 시절 대북정책 기조가 두 달마다 바뀌었다고 밝혔다. 당시 오락가락하던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김 대통령이 그때그때 여론의 향방에 따라 대북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 김영삼 정부를 믿지 못한 북한은 한국을 철저히 따돌리고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만 매달렸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북미간 제네바 합의가 나오고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는데도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북미간 핵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철저히 배제됐다. 김영삼 정부가 한 일이라곤 제네바에 사람을 보내 미국으로부터 회담 결과에 대해 브리핑을 듣거나 미국을 재촉해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에 나서도록 부탁하는 정도였다. 미국이 마지못해 요구를 들어주어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과 대화하도록 했지만, 북한은 대화하는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절했을 뿐 진정한 대화 의지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속 아픈 것은 경수로 문제였다. 95년 3월에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가 출범했고 12월에는 KEDO가 북한과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했다. 총 공사비는 40억 달러였고 한국이 70%인 28억 달러를 부담하기로 했다. 통일되면 결국 우리 것이 될 것이니 그만한 돈 써도 된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달래봐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민 세금을 쏟아 붓는 데 대해 국민들은 속이 불편했다. 더구나 미국은 건설비로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속상하게 했다.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북미간 제네바 합의 이행이 지지 부진하면서 경수로 공사도 차질을 빚었다. 2003년 10월이 완공시한이었지만 이때까지 전체 공정의 33% 정도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경수로 공사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2차 북미 핵위기가 발발하고 북미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2005년 11월 공식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까지 공사에 들어간 돈은 15억 5,900만 달러였고 한국은 70%에 달하는 11억 3,500만 달러를 부담했다.
지금 북한과 미국, 한국 사이의 관계가 94년 상황과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2·13 합의와 10·3 합의, 싱가포르 합의 등을 잇달아 타결하며 관계개선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반면 한국은 북한과 소통이 막혀 있다. 빠르면 이달 안으로 영변 핵 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해체하고 이를 TV로 전세계에 생중계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고 미국은 북한에 식량 50만 톤을 지원하기로 했다. 다급해진 우리 정부가 북한에 연락사무소 개설을 제의하고 식량 지원의사를 밝혔지만, 북한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94년의 재판(再版)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북미 관계에 아직 낙관은 이르지만 현재 핵 협상이 더욱 진전된다면 북한의 핵 시설 해체 문제가 부상할 것이다. 현재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협력적 위협감축 프로그램(CTR)’이라는 평화적 핵 폐기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북한 핵 과학자들의 재취업 문제도 포함되어 있는데 실행된다면 또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우크라이나 등에서 핵을 폐기한 경험을 갖고 있는 미국은 예상되는 북핵 프로그램 폐기 비용을 벌써 한국에 떠넘기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부시 대통령은 북핵 폐기 시 4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프로그램에 대해 대환영했다. 부시 대통령이 왜 그랬겠는가? 한국에 비용을 부담시킬 결정적인 구실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위 글은 교회신문 <13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