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말하였다. 『시학』은 원래 1권 ‘비극' 2권 ‘희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1권만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대철학자가 희극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움베르트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시학』2권의 유일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음침한 수도원에서 전개되는 비밀스런 음모와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었다. 수도원의 비밀 장서관을 지키는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시학』에 독약을 발라놓아 책을 읽은 사람이 독살되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비밀이 탄로 나자 호르헤는 등잔을 밀어뜨려 장서관에 불을 지르고 자신은 책을 씹어 삼키면서 죽는다.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었지만 에코는 아주 사실적으로 중세 수도원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살인도 마다치않는 광적인 신앙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왜 소설에서 호르헤는 ‘희극'을 다른 이들이 읽지 못하게 했을까? 아마도 독실한 신자라면 웃거나 즐거워해서는 안 되고, 늘 죄인의 심정으로 고행에 가까운 슬픈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에게 ‘비극'은 권장되지만 ‘희극'은 금지되고 이단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은 소설적 상황이지만 상당 부분은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 과연 ‘비극'만이 신자에게 권장되어야 할까? 신자라면 웃어서는 안 되고, 즐겁게 사는 것은 금지될 악인가?
확실히 울고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은 신실한 신자의 이미지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언제나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신앙의 징표일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 말씀처럼 참 신앙은 다가올 천국의 소망을 알기에 환난 속에서 웃고, 핍박을 받을수록 더 감사하기 때문이다.
사실 살다 보면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이 더 쉽다. 삶이 고달파서, 혹은 무언가 회한이 남아서, 혹은 죄책감 때문에 등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울기도 하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울기도 한다. 눈물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도 하고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진솔한 눈물은 몇 마디의 말보다 더 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오죽하면 위기에 처한 정치인들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고의로 연출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겠는가. 눈물은 사실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에 훨씬 가깝다.
반대로 극한 상황과 불행 속에서 언제나 웃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순교자들처럼 최후의 순간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숨을 거두는 것은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울지 않고, 밝게 웃는 모습은 머리가 숙여지는 경외감을 준다. 내게는 오래전에 존경하던 장로님이 있었다. 찬양을 할 때마다 언제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신비스럽게 느껴져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천사처럼 환한 미소를 배우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찬양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뜨거운 감동을 받는다. 이제 그 눈물을 웃음과 감사의 찬양으로도 승화시켜 보자.
위 글은 교회신문 <13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