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이 시작되면 서울시청 앞에 밑동의 지름이 10m, 높이가 21m인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이 아름다운 장식물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성탄 트리 위에 있던 별이 십자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에 덧붙여서 모든 사람이 즐거워해야 할 때에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니 시민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몇몇 인터넷 언론이 특정 종교에 대한 지나친 홍보라는 방향으로 여론화시켜 기독교 전체를 흠집 내려는 의도임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참 별걸 다 트집을 잡는다는 생각과 함께 반기독교적 정서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탄절 속에 고립된 예수
어느 문화선교단체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가 과연 어떤 날인가'라는 질문에 절반 이상이 성탄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답을 하였고,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을 떠올린 사람은 10%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통계자료를 토대로 그 선교단체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인정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외쳐지기를 허락할 뿐 공적인 자리에서는 거론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예수님의 생일로, 그러나 공적인 공간 안에서는 연말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하나의 휴일로만 거론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을 산타클로스로 은근슬쩍 바꾸는 것도 모자라 예수에 대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겠다는, 핍박보다 더 교활한 ‘고립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다 뽑아 버려야 속이 시원한 것이 음부의 권세이기에 성탄 트리 위에 놓인 십자가조차 눈에 거슬리는 것이 당연하다.
십자가, 그 영원한 불편함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심정 또한 편치 않다. 어떤 종교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상징으로 하기 마련인데 십자가는 아무리 봐도 오늘날 전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를 상징하기에는 모순점이 많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를 매달아 죽였던 저주의 형틀이다. 이 형틀에서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메시아요 구원자라고 했으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핍박을 당했겠는가? 그럼에도, 십자가를 증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십자가를 예수가 대신 지고 죽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즉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야 하는 그날까지도 십자가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탄생 자체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죽음의 최대의 수혜자가 나라고 할 때, 성탄 앞에서 철없이 날뛸 수 있겠는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십자가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외치는 기도의 의미를 안다면 성탄이 불편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날, 마리아가 빈방을 찾아 돌아다니다 결국 찾지 못하여 초라한 말구유에 몸을 누이셔야 했던 예수. 만약 그 예수가 이 시대에 또다시 오신다면 이제는 그 말구유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은 강퍅하다. 이것이 성탄절을 맞아 기뻐하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 가고 있으니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위 글은 교회신문 <14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