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50일 전투가 끝나자 마자 100일 전투로 주민들을 닦달하고 있다. 4월 20일부터 9월 16일까지 진행된 150일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북한은 당 중앙위 보도문을 통해 “노동당은 이제 전체 인민을 100일 전투로 부르고 있다”며 ‘100일 전투’를 공식 발표했다. 100일 전투의 종료일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연말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주민들을 연일 몰아치고 있다. 북한은 70년대 70일 전투와 100일 전투, 88년 200일 전투 등 고비 때마다 노력동원운동을 펼쳤지만 두 번이나 연이어 동원운동을 펼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북한이 무리해서라도 이런 동원운동을 해야 하는 속사정이 있다는 방증이다.
북한 스스로 ‘체제 수호의 결사전’으로 명명한 이 대중동원운동의 주 타깃은 ‘시장’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북인권단체인 ‘좋은 벗들’에 의하면 2006년 기준으로 북한에는 전국적으로 300개에서 350개 정도의 종합시장이 있으며 수도 평양만 하더라도 락랑구역 통일거리의 ‘통일거리 시장’을 비롯해 40곳이 넘는 시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안남도 평성의 ‘평성시장’, 함경북도 청진의 ‘수남시장’, 나진 선봉의 ‘나진선봉 시장’, 함경남도 함흥의 ‘사포시장’, 평안북도 신의주의 ‘신의주시장’ 등이 유명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인 북한에 웬 시장이 이렇게 많이 있을까 하지만 북한에는 90년대 초반 ‘고난의 행군’ 시절 시장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했다. 식량과 생필품 부족으로 수백 만 명이 아사하고 배급제가 붕괴되면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생계를 유지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장이 섰다고 한다. 당국은 못했지만 시장은 주민들을 먹여 살렸다. 속수무책이던 북한 당국은 시장을 방치했으며 오히려 간부들도 시장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러다 보니 시장은 급속히 확대됐다. 계획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시장의 확산에 위기감을 느낀 북한 당국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른바 7.1조치를 통해 고육지책으로 시장을 일부 인정하고 관리하에 두어 계획경제를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시장은 북한 당국의 의도와 달리 급속히 확산됐고 북한은 2005년 10월 국가배급제 복귀를 선언하며 시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에는 17세 이상 성인 남자의 장사를 금지시키고, 2007년에는 장사할 수 있는 여성의 연령을 39세에서 49세 이상으로 높였다. 또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품목과 가격을 통제하는 한편 공산품은 국영상점에서만 판매하도록 하고 지난 해 11월에는 상설시상을 ‘10일장’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한편 12월에는 종합시장을 폐지해 농민시장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이 같은 시장 탄압 혹은 폐쇄조치는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생존위기에 몰려 사생결단 반발하는 주민들의 대규모 폭력사태는 물론이고 봉기의 두려움으로 북한은 시장을 폐쇄하지 못했다. 그러자 북한은 150일 전투를 시작했고 100일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연이은 ‘전투’로 크게 위축되기는 했지만 시장은 여전히 존재하며 북한 당국은 두려워하고 있다. 주민들이 시장에서 돈을 알게 되었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면서 돈은 이념을 대체해가고 있다. 이 때문에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가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생계를 위해 시장에 뛰어들면서 노동력 부족 등 일탈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남한 물건들이 최고급 제품으로 유통되면서 남한에 대한 동경과 함께 대남 적개심도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전언이다. 핵과 미사일로 체제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 북한은 의도와 다르게 서서히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징후가 강해지고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