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떨어지는데, 나를 내려놓는 일은 힘이 듭니다. 추운 겨울일수록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 선명합니다. 나의 욕심도, 교만도 낙엽 되어 떨어지고 주님만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먼 길을 돌아서 주님 앞에 왔습니다. 병든 노부모님 모시고 성전 곁으로 이사도 왔습니다. 좁은 골목길 따라 교회에 갑니다. 파란 대문집 담장에 경고문이 있습니다. <담을 넘는 자, 이유 불문 법적 조치함>. ‘법적조치함’은 빨강 글씨입니다. 우리가 죄 짓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사단은 나를 철저히 속여 죄짓게 하였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 철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하나님 뜻과 어긋날 때마다 <죄를 짓는 자, 이유 불문, 죄와 사망의 법으로 조치함-사단> 이런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으면 좋았을 텐데.’
주님 은혜로 이제는 예수 믿고 해방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은 나에게는 일생의 가장 큰 기쁨이지만, 사단에게는 참으로 분한 일이어서 사납게 나를 삼키려 합니다. 영적 전쟁에는 승리 아니면 패배일 뿐 휴전이란 없습니다. 사단의 적(敵)은, 구원 받았다면서 여전히 세상을 붙잡고 있는 ‘나’입니다. 내가 전쟁에 지는 순간, 나의 의와 욕심, 교만이 주님의 뜻인 양 여겨집니다. 기도를 하지만 때로는 힘없는 기도를, 때로는 자고(自高), 자긍(自矜)의 기도를 하여 분별력을 얻지 못합니다. 더러운 세상을 붙잡은 채 주님에게 매달리면 거룩하신 우리 주님 어떻게 우리 곁에 있어 주실까.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 판자 이야기는 17세기 세르반테스 시절에는 기사소설(騎士小說)에 등장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요즘에는 온 세상에 심지어 신앙생활 속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합니다.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거인을 물리친다며 풍차로 뛰어드는 돈키호테는 악한 것을 물리치고 큰일을 해야 한다는 이상적인 사명의식에 속았습니다. 시골농부였던 산초 판자는 혹시 주인의 환상이 사실일 경우 자신이 얻게 될 현실적 이익에 사로잡혀 그와 동행하며 시중들었습니다. 황당무계한 말도 듣다보니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승리하고 싶지만 나는 착각하고 실수 합니다. 깨닫고 회개하여도 실수의 책임은 고스란히 내 몫입니다. 어리석음에 어찌할지 몰라 울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목자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은 나에게 빛으로 파고들어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치료하십니다.
처음 주님 앞에 왔을 때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후, 어긋난 관계가 회복되었고, 상처가 씻기었고, 여러 방법으로 내가 혼자가 아님을, 구원의 주님이 새 생명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이제는 세익스피어의 사랑 시가 나의 고백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재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다가//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첫새벽 적막한 대지로부터 날아올라/ 천국의 문전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 하노라>
(Shakespeare, sonnet 29 중에서)
어리석은 나, 또 실수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환난 중에 선다 해도 즐거워하리니, 조금 먹고도 새벽 창공을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자유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