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9-21 11:01:34 ]
짧은 인생이지만 돌아보니 아쉬움만
오늘도 좀 더 절실하게 살 수 있기를
#1. 마빈 토케이어 著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는 책에서는 유대인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그 배움을 삶에 접목해 삶의 지혜로 삼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 5000년 역사를 지닌 이유며, 2000년 가까이 나라가 없어도 그 국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태초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적 자존심을 배경으로 어떤 핍박과 좌절에서도 ‘내일을 향한 오늘의 절실함’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었음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겐 절실함이 있었다. 반드시 민족을 살려야 한다는 절실함, 자기 민족을 대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랜 기간 떠돌아다니며 뿔뿔이 흩어져도 그들만의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저렇게 단단하게 묶일 수 있는 것이리라.
#2. 몇 달 사이 유명 목사들이 죽음을 맞더니 최근에는 유명 스포츠인의 부음이 들려 늦더위 기승 속에 심란한 마음 가득하다. 이제 더는 그들을 못 본다는 이유 때문에 심란한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듣던 이름들이기에 비로소 죽음이라는 문제가 나에게까지 연결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다면 지금쯤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 견딜 수 없는 지옥에서 참혹한 오늘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명제로 얘기하자니 혹자는 재수 없는 소리 말라 하겠지만,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도 길어봐야 50~60년, 짧으면 몇 년 사이에 죽음을 맞는다는 불변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단지 잊으려 노력하며 살 뿐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시간을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위해 쓰고 있음을 부인할 길 없다.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지금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3. 20대 초반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거룩한 비전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러운 일들만 남는다. 나는 왜 그렇게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들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토록 많은 변명 속에 살았을까?
여러 이유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지만 단 하나의 원인을 찾아보니 바로 절실함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지 못했기에 내 기도에는 절실함이 없었다. 그랬기에 절실한 충성이 없었고, 그랬기에 한 영혼을 살리려는 몸부림도 없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사랑도, 충성도, 전도도, 헌금도 그렇게 부끄럽고 한심스럽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라도 죽음을 준비해야겠다. 그렇게 준비해도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이루지 못하고 마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자보다 늘 마음에 두고 사는 자는 오히려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절실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인생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고, 죽음은 오히려 후회없는 인생의 마감이 되며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 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