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140 + 260 알아?”
“글쎄 뭘까? 아마400?”
“어? 엄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굉장히 어려운 건데?”
이제 막 새내기 초등학생이 된 아들아이와 며칠 전에 나눈 대화입니다. 더하기 6까지 겨우 익혀 입학한 녀석은 학교에서 요즘 배우는 100단위 덧셈에 한껏 매료되어 있던 터였습니다. 자부심 또한 만만치 않아서 툭하면 “엄마 이거 알아?”하며 자못 뽐내는 표정으로 위와 같은 질문을 하곤 하지요. 아무튼 아들아이는 만족치 못한 결과로 그날 낭패감을 맛본 듯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 너머를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나 봅니다. 아들아이와의 대화 끝에 한 신문기사를 떠올렸으니까요.
“전문가의 한계는 ‘이미 있는’것만 생각하고 ‘없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지식의 첨단을 걷는 전문가들도 이미 인정된 사실 밖의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만큼 사고의 영역과 폭이 제한되기 쉽다는 뜻이지요. 또한 이것이 현대인들의 특성이기도 하다니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내며 ‘생명공학 만세!’를 외치는 요즘 사람들에게 “영생과 부활을 믿나이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외계인의 언어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겠지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생명 공학계에서 제법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친척 아저씨와 만난 자리였습니다. 제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자 위와 같이 일축해 버리더군요. 하지만 저는 결코 비 상식적이지 않은 근거를 들이밀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올해의 과학자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있었는데…”하며 시작했지요. 창조 과학회에 의하면 그들은 “하와가 모든 산자의 어미”(창3:20)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답니다. 인류는 단 한 명의 여자 조상으로부터 출생했다는 것을 DNA연구로 밝혀 냈다는 것이지요. 이와는 별도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창2:7)라는 말씀 또한 인간 몸을 이루는 17가지 원소가 흙의 그것과 같다는 것으로 증명 되었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과 무슨 상관있니? 이것도 밝혀졌냐?” 그의 또 다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지요.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벧전1:3 ). 그러자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셨나 봅니다. “사람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쫓는다”(딤후4:4) 고 말이지요.
현미경과 망원경 속의 것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는 이 시대의 풍속,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삶을 맡긴 그리스도인들. 이 분명한 경계선 안에는 지옥 불에 멸망될 나를 구하려 아들의 목숨까지 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십니다. 이 상식 밖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양심이며 그것은 부활을 통해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의심 많은 우리들을 위하여 이 위대한 진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길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기에 현대 과학의 대부 아인쉬타인은 말했나 봅니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를 발견하고 싶다”고 말이지요.
아주 연했던 초록빛이 점점 푸르러지며 산들은 온갖 꽃들로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 눈부신 초록 속에는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광채를 더하며 마주치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심령의 무릎을 꿇어 애통할 수 있기에 저는 이 봄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