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영국 시인 엘리엇의 패러독스가 아니더라도 이번 4월은 인내 하기가 참으로 버거운 달인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이 생명력 넘치는 연녹색으로 봄빛을 발하고 있지만 총선 바람이 남기고 간 편 가르기 싸움 탓에 사람들의 마음속은 여전히 스산한 겨울옷을 벗지 못한 듯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교계는 요즘 또 다른 이유로 예사롭지 않은 봄 앓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4일, 인천에서는 세 개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노동조합 준비위원회’가 세워져 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다고 하지요. ‘기독교회노동조합’은 인천 지역 교회의 부목사와 전도사, 사무원 등 교단 직원과 교계 사회단체 직원, 교계 언론인 등을 조합원으로 하는데 종교단체 노조로는 국내 최초라고 합니다. 이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 진 모르겠지만 그리 조용하진 않을 듯 합니다.
물론 모든 주장에는 다 그럴 만한 속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온 땅에 전하는 사도’(롬1:1-6)라는 것, 또한 ‘주님은 교회의 머리요 성도는 그의 몸’(엡1:22,고전12:27)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행동 방식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순종과 헌신, 그리고 낮아짐입니다. 이것을 에너지로 교회 발전이 이루어지기에 여기서 파생 되는 문제들 또한 세상의 합리주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지요.
더구나 사회에서는 요즘 노조 없이 노사 관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무 노조 경영을 새로운 노사 관계의 모델로 내놓으며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교회가 뒤늦게 노조를 세워 세상 방법을 따라 간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전구가 크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빛을 내는 필라멘트가 끊어지면 가치를 잃게 되지요. 정체성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운명도 매 한 가지일 겁니다.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를 내세웠던 유럽의 교회가 거의 문을 닫았고, 영국 성공회가 동성애 문제로 인해 교역자와 성도 수가 줄어 정체성에 위기를 맞은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연유 된 것이 아닐까요?
2000년 전,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자신을 미워했던 유대인들과 싸우며 예수가 사용했던 무기는 오직 사랑과 용서, 그리고 낮아짐이었습니다. 그 싸움은 예수의 승리로 끝났고, 부활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지요. 그의 싸움 무기였던 사랑과 헌신은 인류 구원의 테마 속에서 세상을 이기는 새로운 모델로 선포되어 21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속에서 여전히 강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문제 해결의 키를 성서적 테마로 개발해 새 모델을 선포해 낼 때 교회는 그 생명력이 발휘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세상에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 하시던 예수의 소리가 이 계절 더욱 선명하게 마음속을 울립니다. 톡 튀는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으로 구분되기를, 내 삶의 밑그림에 믿는 자의 색체를 더욱 진하게 덧칠 할 수 있기를 잔인한 달 이 4월에 간절히 바라게 됨은 코끝에 맴도는 라일락 향기 탓만은 아니겠지요?
위 글은 교회신문 <5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