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귀환

등록날짜 [ 2004-10-26 14:52:57 ]

‘아버지, 아빠’ 라는 말 속엔 신뢰, 안전, 권위 그리고 친밀함, 즉 가슴에 껴안고 사랑으로 양육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이 중 어느 한 부분에도 속하지 않는 분이 제 친구의 아버지입니다. 막내 동생 출산 후유증으로 앓는 아내와 올망졸망한 4남매를 버려두고 집을 나간 분이니까요. 친구가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소식은 부산에서 새 살림을 차려 자식 낳고 잘 살며 새 여자의 친정 식구들까지 풍족히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녀와 형제들은 병약한 엄마가 행상을 해 겨우 살아나가는 중에 말입니다. 아버지의 방랑벽은 계속되어 수 년 후엔 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 후 그녀와 형제들이 성장하자 그들 앞에는 아버지의 빚보증 해결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내가 너희 대학 등록금만큼은 꼬박꼬박 보내 주었으니 너희도 이젠 갚을 때가 됐지?” 아버지의 당당한 주장! 그 희생자는 작지만 실속 있는 업체를 운영하던 착한 막내 동생이었지요. 빚보증을 서게 해 놓고 일본으로 도주한 아버지 때문에 회사가 부도난 동생은 현재 아내와 이혼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일본에서 귀국을 했습니다. 친구는 고통스러운 낯빛으로 말하더군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꿀꺽꿀꺽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어.” 헌데, 귀국 후 일주일도 안 돼 아버지가 이번에는 뇌염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이젠 남은 형제들까지 다 망하게 하려나 봐.” 감당키 버거운 병원 비 영수증을 손에 쥐고 그녀가 읊조리던 말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자정 넘어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약해졌어,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던 그 영혼이 너무나 불쌍해. 나, 조금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통곡하고 나왔어. 아버지가 불쌍해” 그 날, 그녀는 30년간 자신을 옥죄어 왔던 분노의 수갑을 ‘긍휼함’이라는 열쇠로 완전히 해체 시켰습니다. 요즘 그녀는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고 바위 같이 요지부동이던 노인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듯한 요즘의 사나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행위는 왠지 낯설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상처만 그토록 안겨 주었던 미운 아버지! 그에게 적어도 격렬하게 비난을 퍼붓던가 아니면 진정한 회개의 고백이라도 받아 내는 것이 이 세상의 논리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녀의 방편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대기권 밖에서 온 능력, 즉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온 ‘관계 회복의 힘’이었습니다. 죄의 삯으로 지옥 갈 운명의 인간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분께서 사용하신 방법 또한 ‘인간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 이었습니다. 결코 잘잘못을 따지는 격렬한 논쟁이 아니었지요.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대립과 분열의 아픔들! 이 또한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 볼 때 시나브로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작은 울타리 안에서 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친구가 제게 남긴 말이 있지요.

“아빠를 용서하게 된 것은 갑작스런 일이 아냐. 아빠에 대한 그 사무치는 분노를 풀게 해달라고 십여 년 전부터 몸부림치며 기도했어. 이제야 응답 됐지. 기도는 역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구나.”

위 글은 교회신문 <6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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