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장래가 유망하던 청년 때 갑작스런 열병 때문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됩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걷기에 도전합니다. 장애 극복 과정에서 생긴 강한 정신력은 그를 1920년대 경제 대 공항의 늪에 빠진 미국 경제를 회복시킨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입니다.
‘그는 고아였으며 유태인에 대한 강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유태인과의 경쟁에 밀려 유일한 꿈인 미술 대학 진학도 실패한 그는 유태인 말살이라는 끔찍한 계획을 품습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에서 600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희대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 아놀드 히틀러. 이들의 공통점은 열등감을 지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결과의 차이는 극명했습니다. 열등감은 이렇게 사람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파괴시키기도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실 현대인의 95%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의식'에서 생기는데,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비교 등 원인도 다양하지요. 명문Y대 교수로 있는 한 선배의 이야기 속에서 그 일면을 실감했습니다. ‘Y대 공대생들은 의대에 못 들어간 것에 대한 열등감으로 4년 내내 시달리며 지내지. 또 문과생들은 상대생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 이것은 의대와 공대 졸업자, 그리고 상대와 일반 문과 졸업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다른 탓이야.' Y대에 지원서조차 못 내는 사람들에겐 실로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회 진출 후의 레벨차가 그 원인이라니 철없는 투정으로만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최근 한 취업정보업체의 조사를 보면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임금' 차이 탓에 대기업 근무자에 대해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열등감의 위력은 비단 개인에서만 멈추지 않고 집단간 분열까지 만들어 냅니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명문 대학들의 고교 등급제 적용과 지금은 위헌으로 판정되어 무효화 된 수도이전 파문 등은 열등감에 의한 지역간 분열을 확실하게 표출시켰지요. 이 원인을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출세 지향적 경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변화시켜야 한다고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3:15) 그러면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렘30:19)라 하셨습니다. 또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시50:23). 이처럼 감사는 모든 죄의 구속에서 해방 받은 자의 고백이며 새 삶을 번성케 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그 속에선 받은 복을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이 열리지요. 그 문을 통해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본성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 때에 비로소 비교와 경쟁에서 오는 열등감은 사라지지요. ‘열등감'이라는 현대병의 특효약은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나 아시나요? 감사는 개인의 선택사항이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위 글은 교회신문 <6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