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일 인명 사전 1차 명단’이 발표 되면서 장안이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민족 지도자로 알았고 그렇게 배워왔던 사람들의 친일 행각이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그 명단 속에서 필자가 졸업한 대학 창설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저 또한 편치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배신감’때문이지요. 사실 일제의 36년이라는 폭압 통치 밑에서 살아 남기 위해 크든 작든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위의 인물들은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정신적 지도자들이었기에 그들의 배신 행위는 역사적 단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배신은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지요. 사람들은 예부터 신의를 인성의 중요 덕목으로 여겨왔습니다. 위인들의 공통적인 덕목 중 하나가 ‘신의’인 것 또한 그것을 입증해주는 실례일 겁니다. 그러기에 ‘신의’를 저버릴 때 그 결과는 참담하지요.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의 폭압 속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을 더욱 좌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배신으로 인한 불행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 세기적 배신행위로 남겨진 것은 로마의 정치가인 쥴리어스 시저를 암살했던 부르투스의 배신일 겁니다. 부르투스의 칼에 찔린 시저가 남겼다고 전하는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 속에는 배신 당하는 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진하게 묻어 있지요.
2000년 전 인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던 예수께서도 시저 이상의 안타까운 마음을 삭히셔야만 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12제자의 완전한 배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은 세기를 거듭하며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회계를 담당할 정도로 예수께 신임 받았던 가룟 유다! 수제자라는 명예를 얻을 정도로 예수께 각별한 신뢰를 받았던 베드로! 그러나 전자는 은 30에 예수를 팔아 넘겼으며 후자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를 저주까지 해가며 세 번이나 부인하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유다는 자살을 했고 영원한 실패자요, 배신자로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대한 믿음의 스승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지요. 그 사이에는 바로 회개라는 큰 강이 놓여 있습니다. 유다는 후회의 감정이 일었을 때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자살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새로운 비전을 안겨 주시며 위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요21:16)
하나님을 수없이 배신하며 죄의 늪에 빠져 살아가야 할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탱할 수 있는 회개의 복을 주신 그분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