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 그늘 아래 섰다. 겨울 나무가 무슨 그늘이 있겠는가. 가로수에는 단풍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앙상한 가지들뿐이다. 모든 것이 다 저버렸는지도 몰랐었다. 무엇을 위해 그리도 바쁘게 살았는지. 뉴스에서는 올해의 십대 뉴스를 보도하며 이제 곧 한 해의 마지막과 또 새로운 시작을 알릴 것이다.
허리케인의 위력 앞에 강대국 미국도 속수무책이었고, 대형 지진, 많은 전염병과 질병들 같은 대형 재앙의 불씨들은 자신만만했던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한다. 인권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프랑스에서 생계 문제와 관련된 폭동이 일어나고, 세계는 여전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며 모의전쟁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뒤의 멜로디를 예측할 수 없는 현대 음악들처럼 아무도 모르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울고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있을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마지막이 있지 아니하면 아름다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올 한 해가 이렇듯 마지막을 향해 달려 가듯이 우리의 앞길에도 언젠가 반드시 한번은 끝이 온다. 지혜로운 자는 현재에 충실하고 더 지혜로운 자는 노후의 삶을 예비하겠지만 진짜 지혜로운 자는 바로 영혼의 때를 위해 산다. 어떤 이는 정말 성자처럼 멋지게 살고서도 주님앞에 너무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엉망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하늘 우러러 부끄럼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무성했던 나무들이 다 고개를 숙이며 앙상한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듯이 우리도 역시 모든 것을 벗은 후 주님 앞에 설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낙엽이 지고 뼈만 앙상한 겨울나무 밑에서 생각해 보았다. 엄위하시고 공정하신 천국의 심판대에서 난 어떻게 나의 모습을 감출 수 있을까. 인생(人生)의 마지막에 섰을 때 뒹구는 낙옆처럼 모든 믿던 것들이 다 날아가 버리면 벌거벗은 모습속에 우리는 또 무엇을 위해 이리도 바쁘게 살았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겨울 나무 그늘 아래 섰다. 겨울 나무가 무슨 그늘이 있겠는가마는 지나온 날들이 너무 부끄러워 겨울 하늘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앙상한 나무 그늘에라도 숨어 보았다. 오랜동안 서서 기도하며 주님께 한 소망을 아뢰어 본다. 이제 밝아오는 한 해에는 정말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벌써 일년의 마지막이다. 또 추운 겨울이 온다. 혹시 아직도 헛된 싸움을 하고 있다면 이젠 그 싸움을 잠시 멈추고 구원의 길목 어딘가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러 가자.
위 글은 교회신문 <7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