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결혼을 했다. 늦장가를 갔는데 너무나 기뻐하는 것이다. 마치 아담이 하와를 쳐다보며 탄성을 외친 것처럼 신랑 신부는 그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기쁘고 좋은 결혼을 빨리 하지 왜 그렇게 늦게까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 미혼인 사람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짝이 없다고들 한다. 선을 보고 와서 고민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다.
그렇다. 결혼은 현실이다. 한두 번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결코 순간의 감정이나 기분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혼은 분명한 현실이요 생활이요 삶이기 때문이다.
옛 조상들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정이 평안해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 행복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이다. 성경도 가정의 중요성을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다. 어진 아내를 얻는 자의 축복과 그 남편의 기쁨에 대하여, 또 다투는 아내와 사는 자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그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있다.
얼마 전 통계를 보니 중매결혼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조건은 ‘남자가 얼마의 봉급을 받는가' ‘여자가 얼마나 미모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랑이니 성격이니 하는 것들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기준이 아닐 것이다. 좋은 신부를 고른다는 것, 좋은 신랑을 고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갈수록 높아가는 이혼율은 결혼에 대해 다시금 신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진정한 결혼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고,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진짜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시고 사랑만을 원하신다는 말이다. 만일 주님과의 사랑에 조건을 따진다면 우리는 아무도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주님과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일방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 날 위하여 하늘 영광 버리고 오신 그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2006년의 마지막 자락에 서 있다. 아쉬움으로 가득한 시간들.... 2007년도에는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신부의 사랑으로 준비하고 싶다. 조건과 외모의 사랑이 아닌, 신랑되신 주님의 사랑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가득한 신부의 사랑으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고, 그리움의 찬양을 부르며, 주님이 은혜 베푸신 모든 세상 가운데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늘 눈물지을 수 있는 그러한 감동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처럼 내 안에도 넘쳤으면 좋겠다.
위 글은 교회신문 <10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