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6학년 아들아이와 안도현 님의 ‘연어’를 읽고 나눈 대화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을 낳고 죽는 연어의 행동이 정말 아름답지?” 짐짓 감동 섞어 하는 필자의 말에 아들아이는 “말도 안 돼. 왜 죽으려고 고생을 해. 너무 낭비적이야.” 답변이 너무나 확고해서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낭비다”이지요.
죽음을 통해 자손 잇기를 이루는 연어의 행위가 자손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이 낭비적이라면, 인간사 속의 사랑 행위들엔 낭비적인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세기의 로맨스 에드워드 황태자와 심프슨 부인의 사랑도 애증으로 얼룩진 삶이었다는 후문을 남겼으니, 왕좌까지 버린 황태자의 사랑은 결과적으로 낭비적이었지요. 이런 낭비적 사랑 중에서도 최고봉이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아버지’가 그 좋은 예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재산가였던 이 아버지에게 어느 날 작은아들이 자신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지요.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작은아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고대 역사학자 베일리에 의하면 “고대 근동지방의 풍습상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답니다. 만약 재산을 분배한다 해도 아버지가 죽기 전엔 그 재산 처분권은 아버지만의 소유였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소유권뿐만 아니라 그 처분권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였지요. 이런 아들은 당시엔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대상이며 동네에서도 패륜아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 패륜아를 위해서 자신을 ‘죽은 자의 자리’에 내려놓고만 겁니다. 지독히 낭비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이 낭비의 결과는 ‘회복된 아들’이었습니다. 돈을 탕진한 아들이 타지에서 파멸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돌아와 회개하고 새 삶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강력한 회생의 힘 때문에 낭비적 사랑들 중에서 부모의 사랑을 ‘거룩한 낭비’라 구별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스케줄을 꿰고서 자녀의 삶을 철저히 조종하는 헬리콥터 부모가 기승을 떠는 우리 사회에서 탕자의 아버지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부모일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그래서일까요? 세기의 위대한 인물 중엔 끊임없이 소망하며 믿고 기도하는 부모의 낭비적인 사랑이 밑천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뜻대로 아이를 만들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의 모습 그 자체에 소망을 갖고 믿어주는 것, 이 ‘거룩한 낭비’를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음성에 귀를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