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가 좋아했던 남자 배우들이 몽땅 출연하는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관람했습니다. “넘 재미있다” “캐릭터들 짱 멋지다!”고 환호하는 대다수의 젊은 관객들의 반응을 뒤로하며 필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들을 생각했지요.
영화 속에도 세 성향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돈이 목적이지만 독립군 편의 킬러이기에 좋은 놈(정우성 분), 돈을 위해서 일본의 앞잡이는 물론이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나쁜 놈(이병헌 분), 이편, 저편 없이 가끔 인간미도 발산하며 돈을 추구하는 열차 털이, 이상한 놈(송강호 분)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우상이 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철저히 담고 있었습니다. 돈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어느 정도로 따라가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놈,놈,놈’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세상이니까요.
2000년 전 성경시대에도 인간 성향은 세 가지로 구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돈이 아니라 ‘율법’이었지요. 당시 세상은 율법을 지키는 의인과 그렇지 못한 죄인, 율법조차 모르는 이방인의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율법의 형식만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을 유지한다고 착각했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문구에 매달려 도리어 율법 본래의 정신을 상실했습니다. 이 결과는 ‘율법으로부터 인간소외’였습니다. 율법 앞에서 죄인과 이방인은 인간 취급을 못 받았지요. 제도의 틀에 갇힌 인간의 눈길은 인간의 겉을 덮는 외형에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순에 당당히 맞섰던 사람 중의 하나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만든 인간 차별의 경계망을 허물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하나님에겐 인간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바울도 인간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놓았고 그 결과 복음의 세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빛을 이었지만 우리 땅은 여전히 차별의 논리로 강력하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유대 땅을 ‘율법’이라는 형식이 지배했듯 ‘돈의 욕망’이라는 형식이 현재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세상엔 겉을 지배하는 형식만으론 해결 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 중심에서 마주치는 것이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당장 보이는 익숙한 기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만용’이라며 비난합니다. 돈의 폭력과 함께 보수 진보라는 이념분쟁의 폭력까지 혼재하는 이 땅에서 ‘너를 위해 나를 내놓음’을 외치는 ‘거룩한 만용의 목소리’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 소망을 실어 나르는 자들, 바로 믿는 자들의 행보가 살아있기에 세상은 아직 아름답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4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