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2-06 13:40:25 ]
해리 오처드(Harry Orchard)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미국의 톱뉴스로 장식되었습니다. 오처드는 레이크 온타리오(Lake Ontario)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20세에 집을 나간 후 방탕아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술과 여자에 빠져 세월을 보내다가 22세에 결혼했지만 곧 신부를 버리고 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가 정착한 곳은 로키 산맥의 탄광지대였습니다. 그 당시는 기업주와 노조 측이 대결하여 혈투를 자주 벌였던 시대입니다.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마다치 않던 오처드는 노조의 테러 단원으로 채용되어 수많은 폭행과 암살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는 콜로라도 주 그리플 크리크(Gripple Creek) 정거장을 폭파하여 사망자 14명, 부상자 100명을 낸 테러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또 뉴스거리가 된 아이다 호 주지사 스투넨버그(Farnk steunen-berg) 씨 살해 사건의 주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1905년 12월 30일, 퇴근한 스투넨버그 주지사가 자기 집 문을 여는 순간 미리 장치되어 있던 폭약이 터져 주지사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노조 측의 지시를 받은 오처드의 소행이었습니다.
오처드는 즉각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처드는 진기한 면회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살해당한 스투넨버그 주지사의 부인과 아들이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의 죄를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오처드를 방문할 때마다 작은 전도 책자를 놓아두고 갔습니다.
점차 오처드의 영혼에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재판부가 모르던 크리플 크리크 정거장 폭파 사건을 위시한 모든 범죄를 자백했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후 감옥에서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자기 일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남들을 도와주고 동료 죄수들에게 말씀을 읽어주면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 변화된 그의 생활태도와 죽은 주지사 미망인의 요청으로 형량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감옥에서 전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