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예의는 나를 성장시키고 행복을 주는 덕

등록날짜 [ 2014-08-19 16:24:06 ]

사회적 관계에서 예의는 여전히 큰 유익을 줘

꾸준한 교육으로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해야

 

청소년들에게 ‘예의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면 아마 생기발랄하고 자유로운 신세대에게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강요한다고 뜨악해 할지 모른다. 혹은 ‘예의’ 하면 사극에서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를 연발하는 조선시대 양반을 떠올리며 한물간 풍조라고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상담하면서,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예의가 중요하다는 것과 예의를 젊은 세대에게 잘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느낀다.
 

요즘 학생들은 핵가족 구조에서 귀하게만 자랐기 때문에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여 본인도 모르게 결례하거나 필요한 예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에서 예의는 여전히 개인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거나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지난해에 한국리쿠르트가 채용담당 면접관을 대상으로 “직원 채용 시 어느 때 가장 부정적 판단을 내리느냐”고 물었는데 80% 넘게 “예의가 없을 때”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면접이 아무리 심층적으로 이루어져도 그 사람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 짧은 순간 어떤 사람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하는 것은 무심코 하는 말투나 행동거지인 경우가 많다. 일부러 예의를 무시하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요즘 세대가 예의를 제대로 배우거나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해 본의 아니게 결례하여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올 상반기 필자에게 S대 의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특강을 요청한 적이 있다. 그는 같은 학교 의대생 수십 명과 함께 고전과 철학 스터디를 진행하던 중 특정 분야의 권위자를 직접 모시고 싶은데 형편이 좋지 않아 망설이다 필자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청을 했다. 필자는 그를 전혀 모르지만 그 뜻이 갸륵해 기꺼이 스터디 멤버들을 건대로 불러 2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무료 특강을 해 주었다.

저녁 7시가 넘어 강의가 끝났는데 이 친구들은 의례적 인사만 했을 뿐 감사에 대한 특별한 표시가 없었다. 물론 필자는 애초부터 강사료나 저녁 대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받는다면 거절하면서 격려해 줄 의향이었지만, 마치 당연한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행동해 오히려 필자가 당황했다.

특강 후 며칠이 지났지만 따로 감사 인사가 없어서 필자가 이런 경우에는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나무란 적이 있다. 물론 뒤늦게 리더 학생이 자기들도 고맙기는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시간이 지났다고 사과했지만 참 씁쓸했다. 이 에피소드가 요즘 공부를 잘하고 모범생인 신세대 학생들의 한계를 잘 보여 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미안함이나 감사함을 적절한 때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동네 청년들이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하고 조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당시에도 낯선 사람이나 신체적 특징이 다르면 배척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 장난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선지자는 이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었고, 즉시 곰 두 마리가 나와 무려 42명을 찢어 죽인 사건이 나온다. 좀 지나치다 싶지만 엘리사에 대한 모독은 곧 그를 보내신 신을 능멸한 행동이기에 그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절과 기지 덕에 화를 면하고 복을 받은 경우도 있다. 미련하고 탐욕스러워 다윗을 모욕했다 멸문지화를 당할 뻔한 남편 나발을 대신해 다윗에게 용서를 구한 아비가일의 사례(삼상25장)가 그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청을 받아들여 복수하지 않고 군대를 돌리면서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33절)라고 하면서 현명함을 칭찬했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럼 왜 예의는 여전히 중요할까? 일찍이 동양의 사상가 맹자는 인간에게 네 가지 본성인 인의예지가 있다고 말하였고, 특히 예는 상대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인의(仁義)가 내적 성품이면 예(禮)는 인간의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 친밀감을 갖게 하는 관계적 덕목이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타인과 공감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수인데 예(禮)야말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예가 없으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예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은 사회 속에서만 맛볼 수 있으며 덕이 탁월한 사람은 그 탁월함을 나누는 친애를 반드시 지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탁월함이나 덕은 타고난 본성이기보다는 오랜 습관과 교육의 결과로 터득한 품성이다.

덮어두고 자연적 성향을 좇거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장 올바른 중용의 길일까 생각하면서 부단히 덕을 갈고 실천해야 탁월성이 쌓인다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실천이 없으면 덕은 길러질 수 없으며 행복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다.
 

이렇게 볼 때 예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덕이며, 타고난 것이기보다는 교육과 습관을 통해 생긴다. 어떤 행동이 바람직하고 필요한지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꾸준히 몸에 익힐 때 탁월함처럼 자리 잡는 것이 예의다. 그리고 예의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풍성하게 가꾸고 타인의 협조와 보살핌을 최대한 끌어내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 덕이다.

리더십의 기본 원리는 타인의 힘과 재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내서 하나의 목표로 모아내는 능력이다. 리더십이 잘 발휘되려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은 적절한 예의와 진심 어린 공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인관계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예수의 사례(눅2:52)를 참조하여 바른 예의를 배우고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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