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2-10 10:28:14 ]
사람은 동물과 달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어야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동물은 어미 배 속에서 태어날 때 이미 동물로서 삶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동물의 됨됨이가 너무나 고정돼 있기 때문에 변화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소나 말로 태어나면 소나 말로서 짐승의 모양으로 살아가다가 생을 마칩니다.
생물학자들이 주목하는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이미 어미의 배 속에서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서 일생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에도 얼마든지 짐승의 모양으로 또는 사람의 모양으로 성숙하면서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크리스천 과학자인 블레즈 파스칼도 “사람은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누가 키우고, 누가 함께 있느냐에 의해서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늑대가 키우면 늑대가 되고, 사람이 키우면 사람이 됩니다. 선한 사람이 키우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사람이 키우면 거의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사람과 함께 성장하고 배우느냐에 의해서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이것이 생물학적 인간학이 설명하는 사람의 존재 가변성(可變性)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키워지고, 사람으로 성장하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인(成人)이 되어 가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고집스럽게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몇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 친구 지금도 여전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도 본성과 성격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평생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인간 모습은, 이미 비뚤어진 존재로서 선함보다는 악함을 더 좋아하고, 악함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어찌 해볼 도리 없이 죄와 악함에 물들어 왜곡되어 경도(傾倒)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선함과 악함 사이에서 중립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악함을 더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선함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악을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선을 행하는 데는 매우 어려워합니다. 사람은 악을 소원하지만, 선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뿌리 깊게 비뚤어져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변화는 마치 계곡에서 홍수가 나서 휩쓸려 내려가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회개’는 자신을 180도 완전히 뒤집어서, 온 힘을 다해서, 거센 물줄기를 맞아가면서 전심을 다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뿌리 깊이 왜곡되어 죄악을 향해 경도된 인간 본성을 뒤바꾸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변화하는 일은 기적이라고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습니다.
죄악을 향해서 그토록 열심히 치닫던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자신의 영혼과 몸에서 거룩함을 이루려고 하는 변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경험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이며,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함으로 살고 싶다는 갈망은 도대체 무엇에서 비롯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까요? 사람은 죄악을 좋아하고, 뿌리 깊이 죄악을 향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거룩함을 향한 갈망이 그의 영혼과 내면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참으로 교회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오래전에 들은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이 듣고 감동 받고 은혜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성도들의 일상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움직여서 그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바꾸어 놓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설교 언어가 사람의 행동을 변화하게 해, 사람을 온전히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은 설교의 목표를 너무나 높게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단순히 인간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면,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일주일 내내 그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힘을 갖고, 거룩함을 갈망하는 성도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설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작업일까요?
교회의 신비로움은 설교라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의해서 교회 내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렇게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최근 우스갯말로 가장 무서운 세대가 바로 ‘중2들’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북한도 ‘중2들’이 무서워서 섣불리 남침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중2들’로 대표되는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인지, 그리고 청소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청소년 4000여 명이 흰돌산수양관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경험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청소년들이 흠뻑 빠져 있는 사이버공간과 TV, 스마트폰은 그들 스스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또 다른 함정이고 속임수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윤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그들은 변화를 경험하고 트러블메이커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나 새 생활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국 사회가 그토록 아파하고 고민하는 청소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청소년들의 변화 가능성이 그야말로 ‘훅’하고 들어와 시작됩니다.
범위를 넓혀서, 흰돌산수양관에 우리나라의 모든 청소년이 그들의 부모님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부모님과 학생들이 아픔의 상처를 치유하는 회개와 그들이 빚어내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부르짖음, 그 변화의 장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중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들을 불러서 그 변화의 장관을 목격하게 하면, 신앙과 관계없이 학생들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소위 ‘중2들’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다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완고한 고집은 그런 변화를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질 수 있다면, 그들은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거룩함을 꿈꾸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기뻐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인간 경험의 변화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장관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위 글은 교회신문 <42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