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을 가슴 깊이 절절하게 느끼다

등록날짜 [ 2023-04-03 22:44:15 ]

<사진설명> 연세중앙교회 안디옥성전에서 열린 실천목회연구원 사모대학 개강예배에서 전국에서 모인 목회자들이 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설교 말씀을 듣고 있다.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당신 삶을 바울처럼 고치십시오

사치스러운 것은 당장 버리고

주가 쓰시도록 예수 정신으로

나를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지구촌 실천목회연구원 사모대학’ 봄 학기가 지난 3월 6일(월) 국내외 목회자를 대상으로 개강예배를 드린 후 매주 월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021년 봄 학기부터 실천목회연구원 참가자를 전 세계로 확장해 윤석전 목사를 값지게 사용하셨고, 지난해 가을 학기부터 다시 한자리에 모여 국내 목회자들을 비롯해 전 세계 목회자들에게 목회할 생명을 공급하셨다. 김병제 목사가 ‘지구촌 실천목회연구원 사모대학’에 참가한 후 작성한 기고를 실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윤석전 목사님은 최근 재개한 목회자들과 사모들을 위한 ‘지구촌 실천목회연구원 사모대학’ 세 번째 세미나에서 사도 바울의 고통과 고난을 말씀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바울은 우리 주님 예수의 고상한 지식을 알게 된 후부터 단 한 순간도 자기 육체를 위해 살 수 없었고, 그렇게 자신의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사치였습니다.


그가 맞이해야 할 최후의 순간도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을 조용히 앉아서 당하는 것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는 주님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죽음을 자청하여 맞이하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영생을 아는 자들에게는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 사이에 커다란 구렁텅이가 끼어 있는 것이 아닌 그냥 문지방 하나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너는 정도일 뿐 별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확실히, 죽음은 바울에게 그저 일상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자기 부인에서 시작하는 바울과의 만남

윤석전 목사님은 바울의 생애를 강의하면서, 마치 바울과 함께 그의 전도 여행을 동행한 것처럼, 아니면 그의 옆에서 제자로 살았던 것처럼 그의 삶과 마음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무던히도 고초를 겪었고, 자신이 세운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에 가까운 아픔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윤석전 목사님도 바울과 같은 목회자의 심정으로 사도 바울의 정신과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천목회연구원 사모대학’ 세 번째 강의에서 윤석전 목사님은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들어가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2000년 전의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면 목회자들의 설교도, 성도들의 신앙도 참으로 풍성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첫째로, 윤석전 목사님이 강조한 것은, 성경 속 인물인 사도 바울을 만나고 그의 정신과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부인(自己否認)이 필수라는 것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부정의 능력(Negative Capability)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역한 사도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확실하게 부정하여 내가 사라져야 하고, 말씀을 조용히 침묵으로 경청해야 하고, 나의 생각과 건방진 지식이 나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판단을 중지하고(epoché), 성경이 그려 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의 모습에 오롯이 집중해야 합니다.


천국이 실상인 자의 목회와 신앙생활

둘째로, 윤석전 목사님이 강조하는, 성경 속 인물 사도 바울을 만나고 그의 정신과 마음을 가져 보려면 우리가 성경 말씀이 가리키는 낯설고 신령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혼의 때’라는 말은 사람들의 경험치를 넘어서는 말로, 낯설고 익숙지 않습니다. ‘영혼의 때’라는 신령한 세계를 맛보고 그 세계를 살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영혼의 때’를 꿈도 꾸지 못하고, 차마 부끄러워서 ‘영혼의 때’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합니다. 그저 육신의 일상에 치여서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윤석전 목사님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수많은 고초(고후11:23~31)를 담담히 설명하면서 마치 사도 바울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눈물을 훔치면서 강의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초와 아픔을 마치 내가 당하는 고통인 양 절절히 공감하면서 강의를 이어 가는데, 바울의 마음과 정신을 아주 가까이서 만나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강의를 듣는 목회자들도 바울의 고난으로 이제는 몸이 저립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후11:23~31).


신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고 잔인하게 죽으실 때, 끓는 물소리처럼 신음을 내뱉으시던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 마치 우리가 있었던 것처럼, 2000년이 지난 동 시간대에도 예수의 십자가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령의 정신을 깊이 가진 탁월한 인물이었는가에 관해 탄복하지만, 그가 엄청난 고난을 겪은 목회자였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윤석전 목사님이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을 그렇게 공감하는 이유는, 같은 목회자로서 고초와 고난을 그렇게도 많이 겪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님이 사도 바울의 고난과 고통을 말할 때, 마치 바울 옆에서 그의 여정을 직접 목격하고 함께 고난을 겪은 듯합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 목회자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도 바울 속으로 들어가서, 바울과 공감하면서 우리 앞에서 깊고 깊은 우물물을 퍼 올리듯이 바울의 사역을 퍼 올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이토록 공감해 내는 글이나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당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사형 선고를 받고 밧줄에 얽매여서 끌려가는 자들의 행렬 끝에 놓여 많은 사람, 심지어 천사들의 구경거리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해도 너희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영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너희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한다”라는 메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요, 예수께서 사용하신 바울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구령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김병제 목사(협동목사)

목회학 박사 / 미국 서든 침례신학교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그의 명(命)대로 죽지 않고 그에게 순교의 은혜가 임했던 것은, 그가 주를 위해서 죽어야만 그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직성이 다소나마 풀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소원대로 해 준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는 주님께서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 흘려 죽으신 은혜 때문에 영원히 죽어야 할 자신이 영원히 살 생명을 얻고 살았으니, 자신도 주님 때문에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만약 남은 생애를 이 세상에서 육신을 위해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구원의 주님 앞에서 허영이고 사치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복을 받아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생활비도 많이 받고, 돈도 펑펑 쓰고, 자식도 돈 많이 들여서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것으로 먹고, 세상의 육신의 요구대로 잘살아야 세상 사람들이 복 받았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요즘 이런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자기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이런 말은 자기 타락과 정욕제일주의를 취하기 위한 자기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들은 영적으로 아주 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다고 단언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10:31), 살든지 죽든지 내가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0~21)’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그때 그의 육체는 머지않아 곧 죽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옥사할 수밖에 없는 그를 꺼내 순교할 축복을 주셨으니, 바울이 참으로 그러기를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막연히 당신의 교회가 부흥되어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좋은 집에서 살고, 돈을 펑펑 써 가면서 호강하는 게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그러자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게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을 향해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나를 따르기를 원하느냐? 너 자신을 부인하라! 네 존재를 인정하지 마라! 네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곧 주님을 위하여,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도 내 존재를 인정하는 만큼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있기는 있되, 그가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 나는 주님에 의해서 내 존재를 드러내야 하고, 내게서 예수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통해 나타나신다는 말씀입니다(갈2:20).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항상 충격에 충격을 더하고, 또 충격이 커질 때마다 절대적으로 주님 앞에서 나는 정말로 죽고 또 죽고 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충격이 되어야 하느냐? 주님이 사용하기에 불편스러운 것이 내게서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충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기 불편한 것을 내 안에서 깎아 내고 깎아 내서 뿌리째 뽑아내야 드디어 주님이 내 안에 반석 같은 기초를 세우시고 나를 쓰시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어부 베드로, 네 평생에 가졌던 네 근본적인 됨됨이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기초를 놓아라. 그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며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인 천국 열쇠를 주어 수많은 사람에게 열어 주고, 닫을 영혼 구원의 권세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부인이 거듭되어 감에 따라 이제 주님이 사용하신 사도 바울의 모습이 점점 우리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자기 부인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사도 바울을 사용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조금도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침묵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판단 중지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사역이 내게서 오롯이 드러나도록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읽습니까? 그냥 읽으라니까 읽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지식은 무지한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은 돈을 벌어 먹고살기 위한 지식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것은 성령으로, 말씀으로, 예수 피로, 그의 이름으로, 영혼 구원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정신, 나는 죽어도 너만은 결코 지옥에 못 보내겠다는 그런 정신을 배우고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계로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1000원짜리에서 1000만 원짜리로 변화시키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는 1000원짜리밖에 안 되지만 주님이 나를 만 원짜리로 만들어서 써 주세요.’ 만 원짜리로 일하다 보니까, ‘주님, 만 원짜리로는 안 되겠어요. 나를 10만 원짜리로 만들어서 써 주세요.’ 10만 원짜리로 일하다 보니까 ‘주님, 10만 원짜리가 아니라 100만 원, 1000만 원짜리로 만들어 써 주세요’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이전에 전혀 상상치 못했던 세계로 들어가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령의 세계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바울의 심정을 깨닫게 되니까 그의 서신을 읽기가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나는 주님이 내 인생을 다시 한번 주시면서 살라고 하실지라도 내가 살아온 날보다 더 잘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 주님이 애타 하시면서 사용해 주셨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바울처럼 못 살고 바울처럼 못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입니다. 예전의 젊음의 때를 다시 준다 해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성도들이 편지를 참 애절하게 보냅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연세 드시는 것이 겁나고, 또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목사님, 잘 잡수시고 힘내시고요, 저희가 목숨을 걸고 기도할 테니 저희가 기도한다는 것 잊지 마시고 힘내세요.’


‘언제 내가 목회하면서 그리스도를 바울처럼 드러냈나, 나타냈나, 보여 줬나? 언제 바울과 같은 영혼 구원의 일을 했던가?’라는 물음이 우리를 항상 사로잡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통 속에서 죽으셨듯이, 사도 바울도 감옥살이와 매 맞음 같은 고통을 수없이 당합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태장으로 세 번 맞고,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해 가면서, 돌에 맞고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고통당하고, 광야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수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의 최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 겉옷 좀 챙겨서 오너라!’고 말했겠습니까! 감옥에서 얼마나 춥고 못 견뎠으면 그랬을까! 간단한 부탁인 것 같지만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가슴 저미는 아픔입니다. 예수님을 방불할 만큼 고통당한 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 아닙니까.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랍비가 되어 얼마든지 잘살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포기했을까요? 예수라고 하는 고상한 지식을 갖고 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당신의 삶을 바울처럼 고치십시오. 사치스러운 것은 당장에 집어 던지기를 바라며, 오직 주가 나를 쓰실 수 있도록 예수 정신으로 개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라면서 썩어 없어질 육신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합니다. 받는 것은 좋아해도 남에게 주는 것이 없습니다. 또 주는 것에 인색해합니다.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내 안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는 말씀도 그들의 양심 속에는 전혀 없는 낯선 말씀입니다. 천국이 진짜로 좋은 곳이라고 믿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어떻다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한없이 나의 상상을 파괴하고, 다른 상상을 갖고 또 가져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좋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목회자들에게 실상으로 없고, 내가 목회하는 성도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가 하는 목회와 신앙생활이 어떻겠는가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목회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믿음의 결과는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결정적으로 천국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을 안 합니다. 왜 말하지 않느냐? 천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또 천국을 그만큼 사모하고 열망하고 흠모하지 않으니까, 천국이 내 안에서 큰 흥밋거리가 안 되니까, 화젯거리가 안 되니까 내 입에서 천국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지옥에 관한 말도 자주 하지 않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또 절대로 지옥만은 가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설교를 참으로 많이 하시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지상에 대한 복도 엄청나게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느 대화 석상에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오늘 새벽에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까딱하면 천국 갈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고 합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이 말을 했더니 강의를 듣던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폭소를 터트립니다. 천국 갈 뻔했다는 말은 죽을 뻔했다, 죽을 뻔해서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럼 천국 갈 뻔한 것이 마치 큰 재앙을 당하듯이 큰일 나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까? 천국 가는 것이 그토록 큰일 날 일입니까? 그분이 늘 그렇게 말하던 천국과 그분의 믿음의 실상이 무엇이었더냐. 그분이 그렇게 외쳤던 천국에 대해서 그분이 천국의 실상을 믿고 있었는가?’ 이런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다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죽으러 가는 동안 일어나는 육신의 고통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천국을 진짜로 믿는다면 천국 가는 것 자체가 걱정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와 함께 일하는 비서실 직원들에게 나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혜리야, 나는 주님이 부르시면 아무런 고통 없이 오늘 밤에라도 천국 가면 너무 좋겠다!’”




위 글은 교회신문 <79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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